검색

강도를 살리는 소리 세상을 살리는 소리

 강도를 살리는 소리 세상을 살리는 소리

 

 

 

 

 

 

 

 

 

 

 

 

 강도를 살리는 소리 세상을 살리는 소리(18:28-40 )

 

 

하나님이 사랑하던 아담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아담이 세상의 영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의 대표자로 예수님을 죽게 내어줍니다.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네가 왕이냐"입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

 

 

아담도 예수님도 세상이 원한 것은 왕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되려 세상의 영에게 유혹을 당했고

예수님은 왕으로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되려하다 하나님께 좇겨났고

예수님은 유대의 왕으로 세상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으로 왕으로 살려던 아담은 세상에 죄를 가져와서 죽고

세상에 예수님은 왕으로 죽으십니다.

왕이 죽어야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왕권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세상의 왕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패에는 "유대인의 "이라 적혔습니다.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27:37]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물은 것은 예수를 놓아줄까라고 묻지 않고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줄까라고 물었습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39)

 

 

왕으로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유대인에게도,

세상을 다스리던 로마의 대표 총독에게도 유대인의 왕으로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죄를 찾지 못했다는 빌라도의 고백이 있지만

그는 세상의 대표자인 빌라도에게 그분의 백성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게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죽음의 낭떨어지로 떨어뜨렸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하십니다.

반석을 치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반석을 치게 하십니다.

반석은 하나님 자신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막대기로 칩니다.

그리고 거기서 샘이 터지고 생수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으십니다.

하나님의 묘책입니다.

세상이 유혹하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향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던지십니다.

반석을 치시고

스스로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극약처방입니다.

세상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이기는 법은

무기를 맞고 살아나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죽음의 가운데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왕으로,

유대의 왕으로,

세상의 왕으로

죽음 한가운데로 친히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도 감당할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기 원하시고

구약의 많은 기적과 이적의 가운데있는 메시지입니다.

 

 

죽음으로 향하신 하나님!

죽음을 정면으로 달려가시는 하나님입니다.

반석을 치라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순순히 잡히시고

순순히 고초를 당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입니다.

 

 

죽음도 이기시는 하나님을 오늘 내가 믿는 것입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왕은 생명을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아담은 생명을 주지 못할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빼앗겼습니다.

 

 

이유는 왕은 사망을 이겨야합니다.

왕은 생명을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37)

 

 

 

왕이 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왕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주는 자가 왕입니다.

 

 

자기의 생명도 유지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명도 지키지 못하는 우리가

자꾸 왕이되려합니다.

자꾸 스스로 주인되려합니다.

자꾸 하나님되려합니다.

 

 

생명을 있으면 왕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생명입니다.

사망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왕이고 생명입니다.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곳에

반석을 치라는 곳에 생명이 생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고 말씀하시는 길을 갔습니다.

살리신 것은 하나님입니다.

말씀이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은 말씀이 가는 곳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은 말씀을 들을 있는 것입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37)

 

 

죽어가시면서 진리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에 속한 자는 음성을 듣는다고 하십니다.

진리에 관하여 증언하신 예수님은 오직 음성을 듣는다 하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들음입니다.

 

 

심판을 받느냐 안받느냐?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내가 여기에 있느냐 저기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진리 안에서 말씀을,

그분의 음성을 듣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은 예수님이 내십니다.

생명의 길은 하나님 스스로 반석을 쳐서 생수를 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길은

음성을 듣느냐입니다.

말씀을 들을 있느냐입니다.

 

 

듣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듣는 곳에 생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말을 합니다.

자기의 이야기를 합니다.

 

 

증인입니다.

증인은 들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들은 이야기,

내가 들은 음성을 전하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면서 자꾸 자기 이야기를 하는 세상입니다.

듣지 않으면서 자꾸 자기 말을 하려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우리의 시작은 내가 결심할 때부터가 아닙니다.

우리의 시작은 음성을 들을 때부터입니다.

종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희귀한 세상이 종말입니다.

 

 

들을 있다면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망은 하나님의 뜻이고 말씀이고 길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지금 내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와 일하려 하실 먼저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법칙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목사님을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은 먼저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고 인식하게 하시고

음성을 따라 가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일하고 사는 방식입니다.

 

 

일은 잘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지가 오래되지는 않았습니까?

경력으로

신앙의 연륜으로 사는 같은데

주의 음성을 듣는 것이 희귀하지는 않습니까?

 

기도는 평생을 하는데 주의 음성을 듣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왕인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반드시 세상의 음성이 들립니다.

우리는 들리는 대로 가는 양입니다.

우리는 들은대로 사는 양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세상의 음성을 들으면 세상의 백성입니다.

 

 

주인의 음성을 들으면 주인의 종이지만

나의 음성을 들으면 내가 주인입니다.

 

 

설거지를 해도

청소를 해도

일을 하지 않아도

음성을 듣고 하는 모든 것은 생명입니다.

맞음도 생명이고

뱉음을 당해도 생명이고

뺨을 맞음도 생명이고

십자가에 달려도 생명입니다.

 

 

음성을 따르는 것이 생명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해도

자기의 음성을 따르면 교주입니다.

자기의 마음의 소리를 따르면 거짓 선지자입니다.

가짜 입니다.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음성을 듣고 가느냐

내가 말하고 가느냐입니다.

 

 

내가 말하면 나의 능력을 증명하려하고

음성을 듣고 가면 능력에 자유롭습니다.

십자가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의 능력은 침묵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도 능력이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때문에 침묵하십니다.

 

 

내가 말하고 속의 음성을 따르면 나의 능력을 증명해야하니 침묵하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자신을 증명해야하고

무엇인가 자신의 힘을 보여줘야합니다.

 

 

그래서 거기는 멍애는 힘들고

짐은 무겁습니다.

내가 능력이 아니고

음성을 따르면 짐은 쉽고 멍애는 가볍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라 할지라도…

 

 

왕으로 살려는 사람은 삶이 무겁습니다.

내가 지고 가려하고

내가 증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무겁지 않습니까?

인생이 힘들지 않습니까?

 

 

음성을 따르십시오.

내가 말하고 말을 책임지려하지 마십시오.

 

 

아무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면 됩니다.

일부러 일하기 위해 음성을 만들지 마십시오.

 

 

열심히 한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는 않습니다.

음성을 듣지 못한 유대인들의 열심은 유대인의 왕을 죽였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때로는 사람을 죽이고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교회를 분열 시키다는 것은 예수님을 죽인다는 말입니다.

 

 

열심이 아니라 음성입니다.

열심은 음성을 듣는 것이고

수고는 그냥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음성을 따라서 여기 심판대 앞에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 있는 것입니다.

심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심판은 음성을 듣지 못하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하지 못하는 믿음 없음이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하나님의 음성에 자신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아담이 잃어버린 믿음,

그것을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믿음은 음성만 듣고

믿음은 음성만 붙잡고

믿음은 음성에 자신의 인생을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자기의 말을 합니다.

자기의 음성을 증명합니다.

 

 

이제 소리를 내려 놓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말을 내려 놓으면 좋겠습니다.

들은 이야기,

들은 음성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듣지 못하니 자꾸 소리만 지르게 됩니다.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40)

 

 

음성을 듣지 못하고 지르는 소리는

아무리 크고 아무리 강해도

오직

강도를 살리는 소리만 됩니다.

빌라도가 따른 소리는 하나님을 죽이는 소리가 되었고

예수님이 들은 소리는 세상을 살리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가면 죽어도 살고

세상을 살리고

나를 살리고

모두를 살리는 소리가 됩니다.

 

 

 

 

그러나 음성을 듣고 가면 죽어도 살고

세상을 살리고

나를 살리고

모두를 살리는 소리가 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