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울 때 (요18:24-27 )
열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 없이 열심히 한다고 달려들지만 인생이 열심히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열심히 주를 좇았습니다.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인데 겨우 뜰에서 불을 쬐는 종들의 말에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세 번을 연거푸 부인합니다.
인생이 허무하게 망합니다.
중요한 것을 잡지 못하고 가는 인생은 닭이 울 때를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부인하도록 정해진 인생입니다.
부인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닭이 우는 때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열심과 다르게 처참하게 깨어지고 부서지고 좌절하고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는 자리,
그 자리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유는 베드로는 중요한 것을 가지지 않고 달렸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자리에 그는 홀로 예수님을 보기 위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없는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성령을 받고 세상을 향하여 외치고 고백하는 소리에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살고 주를 믿어도
이 생명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늘 불안합니다.
늘 두렵습니다.
늘 무서움에 떨게 됩니다.
그 무서움과 두려움은 뭔가를 잡으려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그래서 무서움과 두려움을 떨쳐 보려고 세상의 것으로 막 채우려합니다.
자리로 채우려 했던 베드로입니다.
허전하고 두려운 것을 채우기 위해 사람도 찾고
물질도 채우고,
돈으로도 채우려 합니다.
세상 어떤 왕은 이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죽어서도 수 천명의 기병과 병사를 무덤에 넣었습니다.
다 생명에 대한 길을 찾지 못해서입니다.
그렇게 두려워하고 작은 소리에도 무서워하던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확신과 담대함으로 외친 것은 바로 이 생명의 길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행2:28)
베드로가 열정도 있고 사랑도 있고 남다른 리더쉽도 있었지만
그가 없었던 것은 생명의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세상을 이기는 생명의 확신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길을 전하고 그 생명의 길을 예수님께서 여셨다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고 외치게 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2)
세상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생명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부활의 확신,
죽고 난 후가 진짜 삶이라는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그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열심으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땀으로 되지 않습니다.
더더욱 나의 지식과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이 생명의 길에 대한 확신,
죽어도 죽지 않는 영생에 대한 확신으로만 살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다른 점은
예수님은 영원이시고
베드로는 세상만 입니다.
아직 영원을 보지 못하는 베드로입니다.
죽어도 하나님이 살리실 것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생명의 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증인>입니다.
증인이 되지 못할 때 우리를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증인이 되어야만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2)
무엇을 믿으십니까?
무엇을 전하십니까?
예수 믿으면 잘 된다를 전하십니까?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를 믿으십니까?
그러니 평생 복만 구하다 인생이 끝이고
하나님의 역사는 보지도 못합니다.
베드로가 전한 것은 생명과 증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고 우리는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말한 것도 증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증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지 못하고
늘 두렵고 무섭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것,
베드로가 전한 것,
다 증인입니다.
우리가 증인이 되지 못하니 두렵습니다.
작은 여종의 말에도
겨우 뜰에서 불이나 쬐는 종들 앞에서도 벌벌 떠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가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좀더 더 가지나 못 가지나
좀더 잘 사나 못사나
좀더 똑똑하나 덜 똑똑하나 다 같기 때문에 서로 서로 두려운 것입니다.
다른 것,
세상과 다른 것 오직 하나입니다.
증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증인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증인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한 종을 두려워하던 그가 세상 각지에서 온 사람들,
예수님을 죽이고 자신들을 죽이려던 유대인들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2:14)
증인이 되면 수천이 몰려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41)
증인은 그냥 증인입니다.
본 것을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돌리십니다.
우리는 증인의 일을 하지 않고
내가 실체가 되려합니다.
내가 기적의 주인공이 되려합니다.
내가 능력의 주인공이 되려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힘은 오직 증인으로서의 삶입니다.
생명의 길을 경험한 사람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분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됨을 체험하고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그래서 누구든지 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증인 이상이 되려하지 마십시오.
증인 이상을 하려하지 마십시오.
증인으로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지
우리를 주인으로 살도록 부르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자꾸 주인되라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자꾸 딴 소리 하라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자꾸 자신의 영광을 구하라 합니다.
우리의 영광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전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또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기적을 또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부활하신 주를 전하고
내가 만난 생명의 예수님을 전할 때
그 때 사람들이 돌아오고
그 때 사람들이 살아나며
그 때 성령의 강한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증인입니다.
그 일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도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도
내가 살아 숨 쉬는것도
오직 증인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번을 부인했습니다.
이유는 세번을 물어서입니다.
아마 열번을 물으면 열번을 부인 했을 것입니다.
이유는 그가 아직 증인이 되지 않아서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증인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먼저 경험한 사람,
먼저 증인된 사람이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 때 교회는 회복되고
세상은 주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당신은 증인입니까?
증인이 아니면 당신은 세 번 아니 물을 때 마다 부인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증인의 삶,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 이유입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 목적이면
예수 믿고 그날 밤에 다 천국 가야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믿으십니까?
그럼 다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
아닙니다.
천국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증인 삼아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주님의 살아계심을 나누십시오.
사람을 만나면 주님이 생명임을 전하십시오.
금방 불에서 나온 사람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생명이신 주님을 전하십시오.
삶과 죽음을 전하고
회개를 전하고
생명과 영생을 전하십시오.
그것이 증인의 일입니다.
제발 예수 믿고 복 받았다는 말보다
그분이 생명이라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라는 것을 전하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두려움의 한 가운데 버려두시는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두려움,
죽음에 대한
심판에 대한
삶에 대한 두려움을 지나본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활과 영생과 생명이 얼마나
감격이며 기쁨이며 능력이며 힘인지 압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지나야합니다.
부인하는 자리도 지나야하고
닭이 우는 시간도 지나야하고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 다 포기하는 순간도 지나야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만나고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사용하십니다.
자신의 죽음도 사용하시고
우리의 아픔도 사용하십니다.
목표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지 않는 모든 우리의 간구와 방향은
우리를 주인 되게 만드는 헛된 꿈입니다.
자신의 증인이 되지 마십시오.
주님의 증인이 되십시오.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닭이 울기까지 버려두는 이유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주를 부인하는 이유입니다.
*천목사님이 지내셨던 선교관입니다.
지금은 다른 선교사님이 지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