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뺨을 맞은 이유(요18:19-23)
화를 내는 이유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정직하고 숨길 것이 없는 사람은 어떤 누구에게라도 떳떳합니다.
하나님 앞에 떳떳한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떳떳합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던 베드로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정직하고 숨길 것이 없는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무엇을 물어도 당당하십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 사람의 삶은 늘 당당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당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를 짓고 안 짓고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당당함은 사람 앞에서의 당당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당당함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 삶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한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말이 바뀌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한 말고 저 사람에게 한 말이 다르지 않습니다.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 한 말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와 사람 앞에서의 말이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를 만났는지 누구와 이야기를 했는지 부끄럽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면 화를 냅니다.
아니 때리기까지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22)
구약의 많은 예언이 이루어집니다.(사1:6,욥10:16)
뺨을 맞음으로 수치와 멸시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무죄한 변론을 폭력으로 무시합니다.
그들이 화를 내고 폭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늘 자신의 힘으로 정의를 감추려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화를 냅니다.
빛이 비추이면 어둠이 뺨을 때립니다.
빛이 드러나면 어둠이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죄를 감추려합니다.
예수님이 언제나 당당하고 떳떳하며 순결하며 흠이 없는 이유는
자신의 영광을 구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빛의 모습입니다.
죄의 시작,
<자신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당당함의 이유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지신 의입니다.
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당하는 맞음과 수치과 멸시는 오직 영광으로 가는 의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수치를 이기고 멸시를 이기며 능욕을 참는 이유,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세상은 싫어하고 미워하고
나의 영광을 위해 살면 내 옆에서 아부하고 나 대신 다른 사람을 때려주고
나의 영광을 얻어먹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욕먹고,
잡혀가고,
살기가 궁핍하고
형편이 어렵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로 가는 길,
즉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는 길을 싫어합니다.
자기의 영광까지만 구합니다.
자기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려면
섬겨야하는데,
인자가 온 것은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는 비결입니다.
섬기지 않습니다.
왜요?
불편하니까요!
섬기지 않습니다.
왜요?
내 영광이 사라지니까!
섬기지 않습니다.
왜요?
손해 보는 것 같으니까!
예수님의 잡히심,
예수님의 심문 받으심,
예수님의 결박 당하심,
예수님의 맞으심의 이유는 영광,
섬김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다른 이름은 우리의 섬김입니다.
섬기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 없습니다.
섬기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는 없습니다.
섬기는 삶의 현장이 없는 곳에는
'이 모든 것을 더하시니라'가 없습니다.
세상은 자기의 영광이기에
자신을 섬기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섬길 사람이 나타나면 싫은 겁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
더 능력 있고
더 귀하고
더 인기 있고
더 많은 사람이 따르는 것이 체질적으로 싫은 것입니다.
영광,
영광 말을 많이 합니다.
영광의 다른 이름은 쉽습니다.
<섬김>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복음의 일을 해도
끝까지 섬기는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광,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는 삶이고
아담과 같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 아담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는 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섬김>으로…
묶이고,
재판을 받고,
뺨을 맞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리의 죄를 위함이기도하지만
죄의 시작과
세상 영의 시작의 관점에서보면
섬김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섬김을 받을 것인가
섬길 것인가?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은
영광의 싸움,
즉 섬김의 싸움입니다.
섬김의 현장이 없는 삶은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삶입니다.
밥을 사도 내 영광을 위해 밥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금을 해도 내 영광을 구하기 위해 헌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역을 해도
사역자가 되어도 내 영광 구하려고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분자가 되기 위해
교회의 수 많은 일들을 해내지만
내 영광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열심은
오직 아담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아담의 옛 구습을 벗기 위해
아담의 죄,
아담의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예수님이 택한 세상의 길은
<섬기기 위해> 입니다.
좋은 일하고
귀한 일하고
착한 일하고
교회 일하고
결국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명성을 내고
자신의 유명을 내기 위해 달려가는 인생은 거짓 선지자와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멀리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일주일의 시간을 보내고 예배를 드릴 때
내가 나의 영광을 위해 살았는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는지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내가 섬긴 사람이 있는가?
그 섬김을 통해 내 영광을 구했는가 아니면 오른 손이 아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섬김의 삶이 없는 기독교,
섬김이 없는 교회 생활,
심김이 없는 종교생활,
참 죄송합니다.
다 가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가짜에 속고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진짜인 줄로 여기고 살았는데 그것이 가짜입니다.
영광,
섬김입니다.
그래서 포기 할 수 없는 삶은 섬김 이어야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결박을 당하고 체포당하고
뺨을 맞는 일이 없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선교지 일부에서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일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적 상황,
일반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삶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섬기지 않는 성도,
섬기지 않는 교회,
섬기지 않는 사역자,
설교를 하는 것으로
교사를 하는 것으로
찬양대를 하는 것으로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면 정말 착각입니다.
예수님의 심판,
작은 자를 섬긴 것입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심판의 기준,
섬김입니다.
양과 염소를 가르는 기준!
옥에 갇히고
목마르고
배고프고
벗었을 때
먹이고
입히고
먹이고
함께 했던 것으로 심판,
양과 염소로 나뉨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도 하고
구체적으로 섬김입니다.
구약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원리!
섬김입니다.
천사를 대접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나그네를 영접하며
이삭 추수를 할 때 밭의 귀퉁이를 추수하지 못하게 하며
작은 자를 돌보고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며,
예수님이 왜 죄인들,
창기들,
세리들,
세상이 포기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는지
성경 구석구석 숨겨두신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삶을 우리는 찬찬히 다시 생각해야합니다.
우리의 당당함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의 원리인
나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 당당함이 넘쳐나면 좋겠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어디에 있든
앞에서나 뒤에서나 말이 같고
이 사람을 만나나 저 사람을 만나나 동일하며
그 삶의 중심이
나의 영광을 지나
섬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 당당함을 소유한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는 맞는 것도 섬김입니다.
끌려가는 것도 섬김입니다.
섬기기 위해서 당하는 시간입니다.
섬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회복할 것,
나의 이름,
나의 영광이 아닙니다.
그것만 구하려고 하니 늘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회복할 것,
섬김,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섬김은 몸으로 이루어내는 삶의 향기입니다.
말이 아닙니다
글이 아닙니다.
페북은 섬긴 삶을 나누는 간증의 공간이 될 때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말로 맞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글로 뺨을 맞지 않았습니다.
삶으로
몸으로 섬긴 삶의 흔적,
섬김입니다.
우리의 삶이 공허한 이유!
나의 영광입니다.
몸과 삶으로 나누는 섬김이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