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는 자기가 앞장 섭니다(요18:1-9)
사람들은 내가 앞서려 합니다.
내가 앞장 서려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능력도 구하고 힘도 구합니다.
바보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인데,
예수님을 앞장 세워야 하는데
자꾸 내가 앞장서려 합니다.
나를 따르라 합니다.
나에게 용기를 달라고합니다.
나에게 힘을 달라고합니다.
참 바보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빈 그릇인데
나는 질 그릇인데
은 그릇도 금 그릇도 아닌데
자꾸 내가 앞서려합니다.
그래서 능력 없다고 울고
그래서 힘 없다고 짜고
그래서 바보처럼 징징거립니다.
내가 아닙니다.
실망하고 싶으십니까?
좌절하고 싶으십니까?
망하고 싶으십니까?
나를 보십시오.
자신을 보십시오.
반드시 실망하고 반드시 좌절하고 반드시 망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군인들과 경비병들이 등과 햇불과 무기를 들고 왔을 때
예수님이 앞장 섰습니다.
사람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나는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람은 이미 동산에서 패했는데,
사람은 이미 세상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데
자꾸 내가 나서려합니다.
나에게 무기가,
칼이,
능력이
힘이,
권세가 있어 휘두르면 화평이 아니라
사람을 다치게 할 뿐입니다.
사람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베드로에게 무기는 평화를 만들지 못하고 사람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앞장 서셨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찾는 그가 나라고 나서십니다.
동산에서 입니다.
세상의 영이 찾아 왔을 때 아담은 나섰으나 죽음을 맞았습니다.
세상의 영이 찾아 왔을 때 예수님이 나섰습니다.
동일하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죽음, 다른 결과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나서면 나도 죽고 나와 함께한 사람도 죽입니다.
내가 죽기 위해 나서면 나도 살고 나와 함께한 사람도 살립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묘책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구하는 능력,
우리의 구하는 힘,
우리의 구하는 기적은
가만히 보면 내가 살기 위해 구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능력을 얻고
그래서 힘을 얻고
그래서 기적을 경험하면
결국 나도 죽고 나와 함께한 사람도 죽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앞장서게 해야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 써야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일하게 해야합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을 살리는 법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데 600명에서 1000명이 왔습니다.
이기지 못하는 싸움입니다.
아니 지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입니다 .
싸움의 법칙입니다.
이기는 법칙입니다.
영적인 원리입니다.
죽기 위해 구하면 살고
살기 위해 싸우면 죽습니다.
살기 위해 구하지 마십시오.
죽기 위해서 구하십시오.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살기 위해서 구하십시오.
그것이 내가 죽는 길입니다.
아니 내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당당함은 죽기를 각오 했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 전부를 구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해서 구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결국 나도 망하고 사람들도 망하게 됩니다.
기적의 응답,
능력의 응답,
힘의 소유는 결국 나도 망하고 사람도 망하게 합니다.
끝이 좋지 못한 이유는 다 내가 살기 위해 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이 좋은 사람은 다 내가 죽기 위해 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 살리는 일을 위해 간구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덤비고
제자들은 살기 위해서 덤빕니다.
그래서 나의 이름이 아니라
그래서 나의 능력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의 힘이고 능력입니다.
그것이 모든 생명의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짜 만나고 나서 변한 것은
살기 위해 구하지 않고 죽기로 작정하고 구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역사가 없는 이유는
내가 살기 위해 구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입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실패를
동산에서의 성공으로 바꾸시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실패한 곳에서 성공하게 하십니다.
에덴 동산에서 실패를 여기 동산에서 성공하게 하십니다.
살고자 했더니 죽었습니다.
죽고자 하니 사는 길을 내셨습니다.
영광을 구하자 멸망이 왔고
십자가를 구하자 영생이 왔습니다.
살기 위해 나아갔다 죽음으로 결과를 맞은 아담입니다.
죽기 위해 나아갔다 생명으로 결과를 맞은 예수님입니다.
그 동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죽음의 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죽는 것이 끝 이아닙니다.
우리가 살아내는 일의 시작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동산으로 함께 데려가셨습니다.
죽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이 죽이러 올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삽니다.
이미 죽었는데 우리는 자꾸 살려고 합니다.
죽었는데 살고 싶어 몸부림을 칩니다.
발버둥을 칩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었는데 그 예수님을 앞장세워 죽은 나로 서야 하는데
죽었는데 산 것처럼,
살려고 자꾸 몸부림을 치니 거기에 생명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미 그들의 생명은 끝입니다.
끝이어야 시작인데
자꾸 내가 살려니 갈등만 생기고
아픔만 생깁니다.
그날 그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도 죽었습니다.
예수없는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그것을 모르니
살려고 부인합니다.
계집종의 한마디에 죽어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다 살려고 하는 짓입니다.
죽었는데 살려고 욕심을 부리니 나만 괴롭습니다.
갈등만 더합니다.
그래서 다 버리고 옛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살려면 죽습니다.
미래도 죽이고
친구도 죽이고
함께한 자들도 죽입니다.
그것이 살려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원리는 같습니다.
요한복음에 유일하게 예수님은 자신을 잡고 제자들을 놓아주라합니다.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자중에 하나도 잃지 아니했다는 말씀을 응하게 하려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8-9)
예수님처럼 우리도 죽었습니다.
그 동산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제자들이 한 사람도 잃지 않음을 응하게 됩니다.
내가 죽기 위해 기도하고 죽기달려야 함께한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살려니 함께한 자들이 다 죽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어야 함께한 사람이 다 사는 것입니다.
이미 죽었는데
산 사람처럼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는 우리의 꼬라지가 참 우습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코미디가 됩니다.
세상에서 사는 원리는 오직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순순히 어린 양같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영혼에 대하여 사는 것,
그것이 우리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잘~사는 것입니다.
일대 천입니다.
한 사람 잡고자 천명이 왔습니다.
스스로 나가지 않으면 맞아서 죽습니다.
스스로 나가는 것,
그것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아벨도 죽었습니다.
세상은 반드시 죽입니다.
그래서 죽기 위해서 살아야지 살기 위해서 살면 반드시 영원히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음으로 거래를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거래한 것은 생명입니다.
죽음입니다.
세상에서는 죽어야합니다.
능력에 대하여 죽고
힘에 대하여 죽고
나의 높음에 대하여 죽어야합니다.
세상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많이 반응하고
더 많이 추구하고
더 많이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은 마음도 없고
죽기도 거절합니다.
아니 더 살고 싶어 안달을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생명도
기쁨도
평강도 없습니다.
살려면 우리는 세상을 이기 못합니다.
일 대 천 입니다.
절대 못이깁니다.
이기는 유일한 방법,
예수님과 함께 동산에서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리고
하나님이 높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구하는 것은 땅의 양식이 아닙니다.
하늘의 만나입니다.
하늘이 날마다 주는 하늘의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이스라엘처럼
좀 잘 살아보겠다고
좀 풍성하게 살아보겠다고
좀 편안해 보겠다고
그들이 섬기는 신과 방법을 따르다 결국 다 죽었습니다.
죽어야 사는데
살려니 비참하게 죽습니다.
다 내려놓고 죽음 앞에 자신을 내 놓으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십시오.
세상에서 잘 살려는 마음을 포기하십시오.
세상에서 주는 방법으로 풍요의 신을 좇아 가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유다의 비참함만 있습니다.
제자들을 함께 동산에 세우신 이유를 기억하십시오.
그때 그 시간에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미 소망이 끊어진 사람들입니다.
살려니 부인하고
살려니 도망하고
살려니 숨게됩니다.
살려하지 마십시오.
그냥 예수님과 연합하십시오.
이미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죽음을 지나야합니다.
나의 소망이 끊어져야 하늘의 소망이 옵니다.
인생의 길이 끊어지고
소망이 끊어진 인생들에게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선언하시고 참 소망과 생명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 음성이 들리는 곳에 영원한 생명이 싹을 트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동산에서 앞장 서셨습니다.
먼저,
이미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함께 죽으면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의 만나,
하늘의 것이 내 것이 됩니다.
땅의 것으로 살수 없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채워도 허전함만 더 한 것이 세상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예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