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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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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18:1 )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함께> 남편에게도 주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3:6]

 

 

아담은 하나님께 당신이 주셔서 나와 <함께>

여자가 열매를 주어 먹었다고 핑계를 댄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후에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셨고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6:3]

 

 

하나님은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인간을 두셨다.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그리고 우리가 모여 함께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으로부터 함께에 문제가 생기고

결국 하나님의 함께,

우리안에 거하시는 함께의 영이 세상에 사라졌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예수님의 이름을 먼저 주셨다.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방주에 들어가는 노아에게 약속한 것은 네가 아니라 나와 함께한 자들이다.

함께한 생명들이다.

 

 

구원의 방주의 목적은 함께한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노아와 함께한 자들…

<노아와 함께> 라는 표현은 계속 장에 걸쳐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다.

아삭에게도 주신 약속은 <너와 함께>이다. (26:24)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이상하게 <너와 함께>이다. (28:15)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축복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축복이다.

그것이 복이다.

 

 

요셉도 마찬가지다.

요셉의 인생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게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이다.

<함께함>이다.

 

 

창세기의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이 함께한 역사이다.

역사는 모세를 부르시는 곳에서 다시 함께함의 역사는 시작된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3:12]

 

 

입과 함께 있겠다고 했다.(4:12)

그리고 하나님은 십년을 모세와 함께 하셨다.

 

그리고 여호수아이다.

변함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1:5]

 

 

 

인류의 문제의 시작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순간부터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혼자 두셨다.

혼자 산다는 것이 육체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혼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은 혼자, 독처이다.

그래서 아내를 주셨다.

 

 

함께가 축복인데 인간은 함께의 본질은 하나님을 버렸다.

그리고 세상은 육체가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것이다.

함께를 거절한 인간에게 벌은 혼자이다.

 

 

혼자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먹을 것을 위해 노동해야 한다.

여자의 벌은 아이를 해산하는 벌이다.

아이를 낳는 육체의 고통이 벌이 아니다.

아이를 가지면서 가지는 <영적인 단절> 벌이다.

 

 

아마 아이를 배고 아이를 낳으며 아이를 키워본 여자라면

말이 무슨 말인지 100% 아니 200% 공감 것이다.

 

 

남자에게 주어진 것은 혼자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여자에게 주어진 것은 영적인 단절이다.

자녀의 생산과 자녀는 복인데 그것이 자신에게는

철저한 영적인 단절로 온다.

 

 

세상에 주어진 진정한 벌은 <홀로>이다.

 

세상은 홀로를 채우기 위해 많은 시도들을 하고 있다.

사회적 발전은 홀로, 혼자를 채우고 매우기 위해 수없는 발전을 거듭해왔다.

 

 

모든 문화와 문명의 발달은 홀로를 채우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채울 없는 인간의 홀로를 채우기 위해 인류는 달려온 것이다.

 

 

페이스북을 통해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하는가?

결론은 하나다.

나의 홀로,

나의 혼자를 대신 채우기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절대 채우지 못한다.

?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것은 채움의 존재가 되지 못한다.

나중의 결론이지만

나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남을 채워주기 위해서 사용되어질

그것이 가치로 다가온다.

 

 

믿음의 조상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뭔지 아는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고백이다.

아브라함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

모세와 여호수아를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

요셉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은 한가지다.

구약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까지도 그를 자들의 증언은 한가지다.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니"(6:27)

 

 

그리고 예수님에게 주신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인간의 채워지지 않고

사라진거의 회복,

하나님의 함께함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위해 예수님은 오셨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다.

그것이 오늘 제자들을 동산에 함께 있게 목적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1)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아니라 자신의 고난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것이 삼위하나님의 속성이다.

 

 

아픔도 슬픔도 함께 지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속성속에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제자들이 아픔의 현장에 있게 하셨다.

 

 

함께함,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인류를 향하여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셨다.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 마음에 영원으로 존재하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땅에서의 삶은 <함께> 삶이다.

제자들과 함께 먹고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거하며

함께하는 자가 나와 같은 자라고 하셨고

함께 하지 않는 자가 나를 반대하는 자고 헤치는 자라 하셨다.

 

그리고 바로 말씀하신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하셨다.

성령의 일은 함께함이다.

 

 

하나님의 회복,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함이다.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 보이신 것은 하나님이 함께 모든 것이 가능하며

하나님이 함께 인생에 빛이 보인다는 것이다.

 

 

인생에 빛이 없다.

빛은 오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일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하시는 일이다.

성령이 오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예수의 영으로 우리 마음에 영원히 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하다.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육체가 사람들과 함께 성령의 영으로 거한다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함께 사람들과 먹고 마시며 나누며 마음을 나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물질을 나누고

감정을 나누고

공간을 나누고

방향을 나누며

시간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통해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그곳에는 오직 육체만 존재한다.

육체가 곳에는 하나님의 신이 없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신 목적은

육체가 사람에게

함께하는 영으로 거하시기 위함이다.

 

 

교회의 문제,

믿는 자의 문제는

육체가 세상에

자꾸 함께함이 아니

홀로,

혼자,

스스로 살려는 삶의 모습이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다.

세상을 향한 유일한 대안이 뭐라고 여기는가?

 

사랑이다.

예수님이 세상을 향한 계명을 주셨다.

이유는 계명이 세상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사랑의 다른 이름을 감히 <함께함>이라 부른다.

사랑의 반대 말은 미움이 아니다.

사랑의 반대는 <홀로>이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질 수록 혼자 산으로

혼자 기도원으로

혼자 성경에

혼자 기도의 체험에

혼자 금식에 파묻혀 사는 사람은 가짜다.

 

 

하나님의 의도를 모른다.

아담부터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등등

없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다.

 

 

예수님의 의도,

제자들과 함께 동산에 거하시는 이유를 모른다.

 

 

예수님을 부인하며 떠나는 제자들을 향하여 미리 말씀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아파하고

번씩 말하는지 모른다.

 

 

신학적인 거창하고 화려하고 학문적인 용어와 이름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저버리며

하나님이 예수님과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낸 의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은 점점 힘들고 아픔만 더해간다.

 

 

죄를 향하여,

종말을 향하여 세상의 대안으로 주신 답이

함께함이다.

 

 

사랑의 다른 말은 함께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약속,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약속,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는 세상을 향한 마지막 약속,

땅에 오시기전 주셨던 유일한 이름,

 

 

"영원히 함께함"이다.

 

 

지적하지 말라.

욕하지 말라.

비방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

 

 

답을 원한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하라.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을 향한 답이자

세상이 잃어버린 문제이다.

 

 

!

함께함이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