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요18:1 )
동산이다.
죄가 시작된 곳,
범죄가 들어온 곳,
인간의 문제가 시작된 곳은 에덴동산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1)
오늘 예수님은 동산에서 모든 것을 마무리 하신다.
다른 기자들은 감람산이라는 표현을 쓴다.
유일하게 요한복음만 <동산>이라는 표현을 쓴다.
누구보다 요한은 복음을 정확하게,
인류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은 문제의 시작점에서 문제의 해결을 푸신다.
여자이다.
여자로 시작된 죄의 문제를 <여자의 후손>이 풀게한다.
동산에서 시작된 문제를 동산에서 다시 회복하신다.
그리스도의 인류를 향한 회복은 동산에서 다시 시작된다.
오늘 그 동산에서 사단과 아담 하와가 만났듯이 예수님은 세상의 영,
예수님을 시험하고 죽이려는 유다와 세상과 만난다.
살려고 시작한 인간의 죄의 본성을
죽음으로 마무리 하신다.
높아지려는 인간의 추구를
낮아짐으로 인간에게 답을 주신다.
세번 부인한 제자를 세번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그 아픔을 회복시키신다.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만난 만남이기에
떠나버린 제자들에게 갈릴이에서 다시 만나자고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말하고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회복은 반드시 문제가 시작된 곳에서 다시 회복하신다.
철저히 완벽히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성경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예수님의 고난은 동산에서 시작된다.
동산에서 시작된 아픔을 동사에서 싸매시는 것이다.
정확하게 시작된 곳,
정확하게 문제가 된 곳에서
완벽하게 마무리 하시는 하나님이다.
여자로 시작된 죄를 여자로 예수님이 태어나게하고
동산에서 시작된 죄를 동산에서 마무리 하신다.
우리는 아픔을 회피하려한다.
우리는 문제의 시작된 곳을 피하고 싶어한다.
도망하고 싶고
멀리 가고 싶고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 아픔이 영원히 아픔이 되지 않고
회복의 시작으로 삼으시기 원하신다.
그래서 자신이 친히 그 자리에 서시는 것이다.
그 아픔의 자리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도망하고 싶다.
피하고 싶다.
안가고 싶다.
만나고 싶지 않다.
어떤 대상,
어떤 장소,
어떤 상황,
어떤 사람이건
하나님은 우리를 정면으로 돌파하여 지나게 하신다.
이유는 하나님은 아픔의 실체를 완전히 이기기 원하시기 원하시고
우리안에 어떤 어둠,
어떤 아픔도 남아 있지 않는 빛의 삶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하기 원하지만
하나님은 정면으로 돌파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아픔을 허락하신다.
그것도 같은 문제,
같은 사람,
같은 상황에서 말이다.
돈으로 문제가 된 사람은
같은 돈 문제가 반복해서 발생하고
관게에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는 사람은
자꾸 관계속으로 집어 넣으신다.
실패한 그것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아픔속으로 놓아두신다.
믿음이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믿음.
그 믿음이 우리를 다시 동산으로 가게 한다.
예수님은 일부러 동산에서 기다리셨다.
예수님은 일부러 아픔의 시작인 동상에서 기다리셨다.
인류가 가진 치명적 약점의 장소,
동산에서 유다, 멸망의 아들을 기다렸다.
그것이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다.
반드시 반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완벽한 드라마다.
내 인생의 아픔,
내 인생의 상처,
내 인생의 슬픔은
반드시 동산을 지나야 한다.
그래서 완전한 자유함과 회복이 있다.
내 인생의 동산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일부러 서 계신 그 동산은 무엇인가?
그 동산을 지나야 영원한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