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요17:20-26)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란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서로를 향한 충만이다>
우리의 신앙의 가장 충만은 성령 안에서 서로를 세우는 충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친구로 부르는 영광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에게 주셨다.
자신이 아니라 친구를 위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이야기를 했다.
이유는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드린 사람이기에
하나님은 그를 친구처럼 대하신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자이다.
참 궁금하고 궁금한 경지다.
성경은 그에 관해 "동행"이라는 말을 22,24절 두 번에 걸쳐 사용한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더라""(창5:22)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을까?
그 비밀은 믿음이다.
믿음으로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증거를 받았다(히11:5)
그럼 믿음은 어떤 모습인가?
그 믿음의 절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속성에서 그것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서로를 향한 충만이다.
서로를 향한 자신의 희생이다.
서로를 향한 섬김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은 하나님을 위한 사랑 즉 희생이고 하나님 나라의 회복,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 우주의 회복을 위한 자신의 죽음이다.
성령님 또한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일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되고 그 하나됨을 위해 자신을 드리고 희생하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드린 자신을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과 동행 한다는 것,
에녹이 살았던 하나님과 동행의 삶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의 삶이다.
믿음은 뜨구름 잡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서
서로를 향한 충만으로 섬김과 나눔과 희생의 삶을 사는 것이다.
에녹의 삶은 그 삶을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증명하였고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받았다.
삶이 있어야 증거를 받는다.
그 동행의 삶은 예수님이 최고로 여기는 사랑의 극한
즉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드릴 각오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미 친구를 위해 죽은 사람에게 죽음이 필요치 않다.
이미 그런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고
이미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죽음이 의미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녹을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셨다.
친구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사람,
형제를 위해 전부를 걸고 사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삶을 걸고 사는 사람에게
친구라 부르시며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의 삶을 살게 하신다.
예수님은 오늘 그런 삶을 살게 된 제자들에게 친구라 하신다.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며 오늘 자신의 삶을 나누며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가 되다는 것은 서로를 향한 충만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마음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삶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 여겨보라.
가슴벅찬 일이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기쁨이고 하나님의 기쁨이며
희생과 섬김 속에 기꺼이 살아가는 삼위 하나님의 마음이다.
아담에게 속삭인 세상의 영의 유혹은
<하나님처럼>이라는 것 속에 숨겼다.
'하나님처럼'을 오해하면
우리는 반드시 선악과를 먹게 된다.
사단이 아담을 유혹할 때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으로 유혹했다.
과 연 그것이 우리가 인식하고 알고 있는 하나님처럼일까?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단이 이야기하고 아담이 이해한
<하나님처럼>은 다른 사람 위에 뛰어남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담은 세상에 높아짐 뛰어남 다른 사람보다 나음을 추구했다.
죄의 근본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고 아담도 그렇게 이해를 했다.
이 땅에 선악과 같은 것이 너무 많다.
이유는 '하나님처럼'을 오해해서 그렇다.
'하나님처럼'을 오해하면 섬기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 가지 않고
높음을 추구하고
능력을 추구하고
섬김 받음을 추구하고
기적과 이상과 환상을 요구한다.
'하나님처럼'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향한 충만,
하나됨,
섬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김,
성령의 열매를 구하게 된다.
성령의 열매는 절대 사단이 유혹하고 아담이 오해한
<하나님처럼>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서로를 향한 충만이기에
하나됨에 전부를 걸고
사랑에 목숨을 걸며
낮은 곳을 향한 마음에 자신의 전부를 드릴 줄 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전부 드렸고,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
하나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줄 때이다.
영광을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신의 영광을 주지 않는다.
아니 자신의 손에 영광을 쥐어 자신을 통해 영광을 돌리려 한다.
그것이 선악과이다.
영광은 자신의 손에 잡지 않고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쥐어주는 것이다.
왜 교회 안에 문제가 생기는가?
왜 우리 맘에 문제가 생기는가?
영광을 내가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영광의 싸움의 마지막 깃발을 내 것으로 두려 하기 때문이다.
다 자기 영광이다.
영광을 내 놓아야한다
내가 누리는 혜택을 내 놓아야한다.
내가 가지는 편안함을 희생해야한다.
내가 가진 것을 내 놓지 않는 곳에는
하나님처럼되기 위한 몸부림만 남는다.
정말 영광을 원하는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원하는가?
하나됨에 전부를 걸어야 한다.
거기에 영광이 있다.
하나됨은 자신의 영광,
자신이 누리기 원하는 그 선악과를 내려 놓아야한다.
자신의 희생,
자신의 피,
자신의 섬김,
자신의 낮아짐을 드려야 영광이 온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하찮은 사람들,
세리들,
죄인들,
예수님을 부인한 자들에게 드릴때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셨다.
우리가 드리는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 있는가?
우리의 좋은 것
내가 누릴 좋은 것을 나의 형제들,
나의 친구들에게
나의 영광을 함께 드리고 나눌 때 하나님이 받으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있는 곳에 그들,
죄인들,
세리들,
세상이 포기한 사람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자들이 있게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함께 보기를 원하였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다면
우리의 영광에
그들을 동참하게 해야하고
그들에게 우리의 영광을 돌려야한다.
우리의 가장 좋은 것,
우리의 가장 귀한 것,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을 내 놓아야한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돈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위치나 권세나 높음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생명이다.
당신의 삶이다.
생명과 삶을 그들과 동행하는 것이 당신의 영광을 내 놓는 것이다.
얼마 되지 않는 헌금으로
얼마 되지 않는 시간으로
얼마 되지 않는 땀과 봉사로
자신의 영광을 다 드렸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생명과 삶,
바로 나 자신의 <동행>이다.
에녹의 삶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에녹의 삶은 물질을 넘어
돈을 넘어,
얼마의 땀을 넘었음을 기억해야한다.
아들 므두셀라를 낳고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것이 동행이다.
잠깐의 드림,
잠깐의 동행,
잠깐의 물질이 아니다.
삼백년이란 의미는 평생을 의미한다.
평생을 동행한다는 말이다.
평생이라는 말은 자신을 말한다.
<나 자신>
하나님은 오늘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삶의 동행을 원하신다.
동행이다.
성령이 내 마음에 오신 이유.
성령이 내 마음에 거하신 이유,
동행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기 원하신다.
그것은 한번의 선이 아니라
의인의 삶을 원하신다.
그것은 <서로를 향한 충만>이다.
예수를 고등학교 1학년 때 믿고 기도했다.
말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친구들의 기도제목을 알게 해 달라고.
예수를 만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1시간씩 교회 본당에서 밤마다 기도했다.
55분 기도가 중보기도다. 다 친구를 위한 기도다.
그들을 위한 기도다.
그리고 5분!
하나님 아시지요로 끝나는 나를 위한 기도다.
그러다 기도하면 그들의 기도가 보인다.
그러다 기도하면 그들의 아픔이 느껴진다.
그러다 기도하면 그들의 삶이 보인다.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 보인다.
내 기도의 유일한 제목은 친구들이었다.
그들의 기도제목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기도 속에 그들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도제목을 묻지 않는다
기도를 부탁하지 않는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마음을 주시는 대로라면 충분하다.
친구다.
내 사랑하는 친구들.
그들이 내 삶의 전부다.
그들의 기쁨이 내 기쁨이고
그들의 아픔이 내 아픔이다.
내 인생은 없었다.
내 인생은 내 친구다.
그 친구를 위해 나는 물질도 쓴다.
그 친구를 위해 내 전부를 건다.
내가 못 먹어도 내 친구 먹이고
내가 형편없이 살아도 내 친구 형편이 나아지면
하나님의 기쁨,
예수님의 영광이 내 안에 있다.
이 기쁨이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이라 믿는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이 하늘의 기쁨!
놓치지 않는다.
때로는 섬기고 나면 나보다 형편이 나아 보이고
때로 베풀고 나면 나보다 더 좋은 삶 가운데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기도한다.
'하나님 저 사람 나보다 더 잘 살아 보이는데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형편은 너보다 나아도 마음은 힘들어…'
나는 아마 마음을 주시면 친구가 내 삶의 일등이 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친구 속에 사신다.
혹 내가 보지 못할까 하나님은
친구 마음에 사신다.
그래서 친구는 나의 하나님이 된다.
눈이 좋지 않아 혹 하나님을 보지 못할까
하나님은 눈에 잘 보이는 친구의 사는 형편 속에 살고 계신다.
때론 내 안에 계신 하나님만 보이지만
또 정신을 차리면 눈앞에 하나님이 친구 속에 계신다.
그래서 친구는 나의 하나님이 된다.
더 많은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
더 많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더 많은 성령님의 인도를 기대하고 기다린다.
그래서 예수님이 더 기뻐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더 행복하면 좋겠다.
예수님의 기쁨,
하나님의 행복이 나의 웃음이고
예수님의 눈물,
하나님의 아름이 나의 슬픔이다.
나는 뜬금없이 친구가 생각이 난다.
그럼 전화한다.
마음은 먹고 전화한다.
얼마를 보내지.
꼭 필요한 때 필요한 시간이다.
하나님이 친구의 형편에서 부르시니 내가 듣는다.
친구를 만나게 된다.
우연이란 없다.
친구가 위로가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다.
대접하고 섬기고 나누고
들어주고 같이 먹고
같이 긴 대화를 하다 보면
내 안에 하나님이 위로를 받고
친구의 하나님이 힘을 얻는다.
하나님이 사는 방법이다.
예수님이 일하는 방법이다.
성령님이 거하는 방법이다.
동행이다.
하나님은 친구를 향한
서로를 향한 충만으로 동행하신다.
혹 걱정이다.
동행해야 하는 친구인데
보지 못할까
혹 염려다.
하나님이 친구 속에서 부르시는데
듣지 못할까
그래서 나는 생각나면 전화하고
그래서 나는 생각 나면 찾아간다.
그것이 하나님이 동행하는 방법이다.
나는 늘 친구가 그립다.
아니 친구 속에 하나님이 그립다.
작은자들 속에 사시는 예수님이 그립다.
눈물 나도록 시린 하나님을 향한 동행에
나는 오늘도 나의 전부를 건다.
그것이 내가 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이다.
친구!
내 삶의 전부다.
하나님이 그들 속에서 사신다.
동행이다.
*모잠비크 사역자인 물람보전도사가 왔습니다.
모잠비크는 현재 3개의 교회를 세웠고 두 명의 전도사가 더 있습니다.
농장 프로젝트를 한인교회에서 지원해주셔서
가축프로젝트와 농사프로젝트가 진행 중입니다.
너무 열악해서 먹을 것도 일할 것도 없어 농사를 통해 교회와
지역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너무 귀하게 수고하는 물람보 전도사는 우리의 친구입니다.
검은 땅 모잠비크에 복음의 빛이 아름답게 비치고
그 빛으로 그들이 행복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