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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근거

기쁨의 근거

 

 

 

 

 

 

 

 

 

 

 

 

기쁨의 근거(16:16-27)

 

 

 

 

근심하십니까? 근심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사람들이 근심합니다. 근심이 걱정이 되고 걱정이 염려가 되고 염려가 병이되고 병이 죽음이 됩니다. 근심에서 부터 시작하는 세상의 아픔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근심의 이유를 하나라고 합니다. 예수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에, 마음에 예수가 사라지면 그때부터 근심이 시작됩니다. 함께 있을때는 잔치입니다. 함께 있을 때는 천국입니다. 사라지니 지옥이고 보이지 않으니 근심입니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0-22)

 

 

 

근심의 이유를 가만히 보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면 근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근심입니다. 세상의 근심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근심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간다 하니 보지 못한다 하니 근심입니다. 세상은 보지 못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세상은 눈에 예수가 사라지면 기쁨입니다. 그런데 제자의 유일한 근심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때부터입니다. 그것이 근심의 시작이요 걱정의 시작이요 염려의 시작이요 병의 시작이요 죽음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가장 근심해야하는 것은 예수님이 눈에 마음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근심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없던 예수님이 보이고, 만날 없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인생에 기쁨이 회복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망입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아무리 절망이어도 아무리 근심이어도 아무리 걱정이어도 눈에, 마음에 예수님이 보이면 기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기쁨의 이유를  유일하게 세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

 

 

근심의 이유는 예수가 보이지 않을 때이지만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기쁨, 유일한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능력도 아니었습니다. <기쁨>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처음 만났을때 기쁨이 있었습니다. 세상 주어도 바꾸지 않을 이름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고 시간이 가고 연륜이 쌓이고 경력이 쌓이면서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근심이 찾아오고 염려가 찾아옵니다. 걱정이 마음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어둠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의 시작, 세상의 유일한 기쁨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인생에 기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을 만나도 예수님이 보이면 잠을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을 만나도 예수님이 보이면 이겨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죽음이라도 예수님이 거기에 계시면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근심의 깊이를 ''하고 '애통'이라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20)

 

근심이 깊이는 곡하고 애통하는 깊이 입니다. 곡은 죽음 앞에서 말하는 소리입니다. 애통은 슬픔의 통곡입니다.  깊은 인생의 슬픔과 통곡이 예수님이 없는 사람이 만나는 근심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면 죽어도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아파도 찬양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넘어져도 감사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계신 곳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에는 어떤 누구도 빼앗을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쁨이 아니라 편안한 것을 찾습니다. 편리한 것을 구합니다. 세상의 편안과 편리가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기쁨의 본질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눈에 사라지면 근심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근심이 와도 예수님만 보이면 거기에는 반드시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이 복음의 소리입니다.

 

 

 

둘째,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15:11]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르신 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

 

 

예수님이 땅에서 누렸던 기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입니다. 기쁨이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기쁨이 우리 안에도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서로 사랑입니다. 사랑 주시는 하늘의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통한 기쁨이 아니라 미움을 통한 원망, 원망을 통한 아픔, 아픔을 통한 슬픔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헤어나오지 못하는 절망속에서 예민해지고 민감해지고 그래서 누구든지 걸리면 죽는 다는 마음으로 거칠게 살아가게 됩니다.

 

한국을 보면 그렇습니다. 멀리서 느끼는 한국은 생활은 편리는 해졌으나 마음은 불편하고 삶은 나아졌으나 영혼은 곤고해졌으며 사람은 많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없는 황폐한 마음과 영혼만 모인 공동묘지 같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도 없고 거기에는 사랑도 없어서 기쁨의 얼굴은 찾아보기 힘든 죽은 묘지 같은 교회가 되어가는 같습니다.

 

 

교회의 소리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소리가 나야 교회에 아픔이 소리, 근심의 소리, 절망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권능과 능력이 아닙니다. 안에 예수님, 서로 사랑하는 작은 섬김 속에 하늘의 기쁨, 예수님이 그렇게 주기 원하셨던 잃어버린 인류의 기쁨이 있습니다.

 

 

아무리 형편이 나아지고 아무리 환경이 좋아지고 아무리 먹을 거리가 많고 아무리 구경 거리가 많은 한국이어도 예수님이 마음에 없는 사람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한국은 천당 옆에 분당이 아니라 분당 옆에 지옥의 소리만 들리는 아픔의 장소입니다.

 

 

기쁨의 회복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기쁨이 아니라 기술과 사랑이 아니라 사회를 향해 달려갈 거기에는 예수님도 하늘의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가장 쉬운 가장 가까운 곳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그리고 서로사랑입니다. 성경은 거듭 거듭 진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23-27)

 

 

 

우리의 기쁨의 근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능력이고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예수님이 이름의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전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이름의 능력입니다. 이름이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길을 것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얻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얻게 되므로 얻는 기쁨,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심하십니까?

걱정하십니까?

염려하십니까?

 

기쁨의 이유를 알지 못해서입니다.

예수님이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기쁨의 충만의 이유입니다.

서로 사랑이 기쁨을 가져다 주는 샘입니다.

 

 

쉬운 곳에 하늘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