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쉽은 로드쉽이다. (요14:1- 31)
참 리더쉽은 어떤 리더쉽인가? 진정한 리더는 어떤 리더인가? 요한복음에 등장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 참 리더쉽을 보게 된다. 참 리더쉽은 참 로드쉽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진정한 리더쉽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완전하게 인정한 로드쉽(Lordship)을 회복한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리더의 문제는 회복되지 않은 로드쉽으로 사람들을 리드해 가려는데 있다.
사람을 어떻게 리더해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내가 얼마나 로드쉽을 회복할 것인가를 고민 하는 것이 리더쉽을 훨씬 빠르게 세우는 방법이다.
예수님의 로드쉽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첫째,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라고 인정한 로드쉽이다.
예수님은 만났던 사람들, 함께한 제자들이 자신이 선택해서 만난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들의 존재는 세리나 죄인이나 병든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관계를 형성했다.
이것은 리더쉽을 형성할 때 엄청난 다른 결과를 낳는다. 자신이 가지는 리더쉽은 자신의 기준에 따른 선택과 버림이다. 그래서 자신이 필요하면 선택을 하고 자신에게 불 필요할 경우 관계를 포기해 버리고 만다. 그것은 참 리더쉽이 아니다. 진정한 리더쉽의 모형은 하나님이다.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습성을 예수님에게 그대로 보인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요13:1)
이 끝까지의 사랑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때 포기하지 않는다. 끝까지 사랑하게 된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6:39]
진정한 리더쉽의 시작은 로드쉽의 회복이다. 그 로드쉽의 시작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이라는 사람에 대한 관계의 정의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관계하게 된 사람, 내가 돌봐야 하는 사람, 내가 섬겨야 하는 사람이 내가 취사 선택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이라는 인식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베드로에게도 동일하다. 예수님께 오는 많은 양떼를 네게 부탁한다 하셨다. 예수님께 오는 양들을 베드로에게 보내겠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양은 주님께서 보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보내심에 대한 사람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정한 로드쉽의 회복은 없고 진정한 리더쉽도 없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내가 선택했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사람들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형성된다. 그러나 나와 함께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내시고 허락한 사람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의 리더쉽은 로드쉽의 기반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나의 가족, 나의 성도, 나의 관게의 대상자들이 주님이 허락하고 주님이 주신 사람이라는 정의가 먼저이다. 주님이 주신 사람이라는 로드쉽의 회복이 먼저이다.
그래서 주님은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정의를 <아버지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고 늘 단서를 붙이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요6:37]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6:65]
진정한 리더쉽은 주님이 이 사람들을 주셨다는 로드쉽이 회복될 때 발휘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로드쉽위에 세워진다. 우리는 로드쉽 없이 리더쉽을 발휘하려 한다. 그것이 가장 세상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려는 심각한 오류다.
리더쉽은 로드쉽의 열매이다.
둘째, 섬김이다.
왜 섬겨야 하는가?
나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 내가 사람들을 이용하는가? 나의 사람, 나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래서 그들을 섬기지 않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인식해서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의 발을 씻김 같이 너희도 서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다.
나의 사람이면 그들이 나를 섬겨야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사람들이다. 주님이 보내신 사람이다. 주님께 속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을 섬기는 것이다. 주님이 산 사람들이다. 내가 산 사람들이 아니다. 주님이 대속하시고 영원으로 부르신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섬기는 것이다. 그들을 섬김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다. (마25장)
그래서 도마같이 빌립 같이 가롯인 아닌 유다 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기다리고 설명하고 보여주고 인내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리더쉽의 목적은 어떤 정한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방향으로 먼저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리더쉽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없는 단어이다. 우리를 리더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구원의 계획과 교회를 세우며 사람을 세우는 모든 것이 나에게는 없는 단어다. 그래서 그분이 친히 인도하시고 우리는 오직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온전한 리더쉽은 온전한 로드쉽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을 인정하는 나의 로드쉽에서 참 리더쉽이 나오게 된다.
주를 인정하지 못하고 주의 주 되심을 고백하지 못하고 주의 주 되심을 삶으로 살지 못하는 곳에는 위치의 높낮음으로 인한 침묵은 있지만 권위는 없다. 위치에 의한 조정은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구원의 역사는 없는 것이다.
리더에게 가장 비참한 것은 겉으로는 따르나 마음이 없는 팔로워(follower)들과 지내는 것이다. 리더로서 가장 비참한 형편이다.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가? 그것은 팔로워들이 리더를 통해 로드쉽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로드쉽이 부재한 리더는 사회적 위치의 따름은 있으나 그 리더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주 되심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존경이 없다.
리더로서 가장 빠르게 리더쉽을 회복하는 방법은 로드쉽의 회복이다. 그때 팔로워들은 리더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함께 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게 된다.
왜 리더들에게 이런 로드쉽이 없는가? 하나님에 대한 로드쉽이 없으면 오로지 자신을 섬기라는 은연 중의 폭력과 억압이 형성된다. 그것은 위치에서 나오는 한마디는 폭력이 되고 억압이 되고 무서운 힘이 되는 것이다. 섬김이 부재된, 로드쉽이 부재된 리더쉽은 팔로워들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을 주게된다.
철저히 하나님이 주신 사람,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의식을 하지 않으면 자칫 우리의 리더쉽은 그들 위에 굴림 하려하고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 싶어하고 섬김이 아닌 나의 뜻을 위해 이용하는 위치에 너무나도 쉽게 서게 된다.
선교사에게 이것이 가장 위험하고 쉽게 빠지는 문제다. 현지의 사역자들에게 이 로드쉽을 빼고 접근하면 그들은 나의 목적을 이루고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인격적 관계는 고사하고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힘듦이 나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쉽다.
로드쉽의 회복은 발을 씻기는 행위 즉 ,섬김의 행위가 회복되지 않으면 결코 말로 회복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가 선교사가 사역자가 설교를 하고 말씀을 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힘들다.
회복되지 않은 로드쉽으로 리더쉽을 발휘하려면 꼭 강압과 언어의 폭력이 따른다. 그래서 주를 믿지 않는 모든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리더쉽은 강압적이며 폭력적이며 영혼을 무시한 행위와 언어가 쉽게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리더쉽은 한마디로 이 로드쉽의 권위이다. 단 한번도 제자들에게 자신을 섬기라는 섬김을 강요한적이 없다. 스스로 섬기러 왔다고 하셨고 발을 씻기고 선생된 자가 제자를 주인이 종을 섬기는 로드쉽으로부터 오는 섬김의 권위를 보여주셨다. 이것이 참 리더쉽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주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사람이 붙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그와 가까이 하고 싶어한다. 따르고 싶어한다. 함께 있고 싶어한다. 그것은 그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신비, 영적 비밀을 알고 싶어서이다.
하나님을 향한 로드쉽이 인정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하나님의 형통이 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일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그들의 믿음과 로드쉽의 매력적인 모습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고 함께하는 이유이다. 가장 강력한 리더쉽은 가장 강력한 로드쉽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요셉의 리더쉽은 로드쉽이다. 그 로드쉽은 섬김의 리더쉽으로 자연습럽게 나타난다. 가장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고 싶다면 가장 강력한 로드쉽의 회복이 우선 되어야한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사람들이 어떤 능력과 힘이 있어야 나를 따를 것이라 여긴다. 그것이 세상의 리더쉽이다. 그 리더쉽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믿음이다. 믿음으로 철저한 로드쉽을 보일 때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시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경험이 있어야 더더욱 로드쉽을 발휘 할 수 있다.
셋째,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믿음이다.
예수님의 로드쉽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다. 세상사람 다 아니어도 하나님이 내 안에 함께 계신다는 확신이 참 리더쉽의 근본이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근거는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확신이다.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 곳에는 참 리더쉽을 발휘할 수 없다. 방향 없는 배요 길 없는 사막이다.
그런 사람이 사람들을 리더 할 때 수 많은 사람은 방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주님은 사람들을 떠나 홀로 계시는 동안 다른 것을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확인하고 호흡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것이 참 리더쉽을 가지는 삶, 바로 로드쉽의 비밀이다. 사람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시스템을 이용하고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목회와 선교와 기업의 목적을 이루려 수없이 고민하지만 가장 강력한 프로그램과 시스템은 나 스스로 주님안에 거하는 것이며 그 주님이 내 안에 호흡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주님이 내 안에 없음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런 마음으로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들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과 수단만이 남게 된다.
우리는 세상의 방법이 다 소용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오직 복음의 법, 성령의 법, 하나님의 법만이 유일하다고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가장 강력하게 세상의 프로그램을 기웃거리는 사람이 우리들이다.
가장 강력한 프로그램은 성령께서 친히 일하게 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직접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주님이 머물고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일하게 해야한다. 내 뜻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나를 내어드리는 법이 가장 빠른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리더로서 전략을 짜고 계획을 세우기 전에 내 안에 계신 그분으로 인한 담대함이 먼저 있어야한다. 주를 믿는 리더로서의 확고한 주되심의 고백적 삶이 먼저 이어야한다. 이 내적 확신과 외적 고백이 함께 할 때 사람들은 나를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담대함은 이 하나님의 내적 함께함의 확신이다. 늘 큰 사건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고, 구약의 인물들이 예수님께 힘을 더했고, 천사들이 주를 수종들었다. 이 모든 이유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함께함에 대한 외적인 확신과 내적 함께함의 근거가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쉽의 힘은 외적인 프로그램이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내적 확신이다. 함께함의 뜨거움이다. 주님이 함께 한다고 믿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도 없고, 세상을 향해 가장 담대하고 강한 확신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주님을 따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은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담대함 이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10,11)
예수님의 리더쉽은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 로드쉽이다. 로드쉽이 회복될 때 우리는 진정한 리더쉽이 회복된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리더쉽을 발휘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 리더쉽의 참 근원은 로드쉽이어야한다. 로드쉽 없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내 삶이 없는 리더쉽은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사람들을 더욱 방황하게 하는 리더가 될 뿐이다.
갈 길이 멀다. 진정한 로드쉽이 회복되어야 리더쉽이 회복되는데 내 안에 이 로드쉽이 완전히 회복되는 날 주님이 더 많은 영혼들을 섬기는 기회를 주실 것이다. 참 리더쉽은 참 로드쉽에서 온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내 삶에 참 로드쉽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