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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 부인의 이유

세 번 부인의 이유

 

 

 

 

 

 

 

 

 

 

 

 

부인의 이유 (13:30- 38)

 

 

 

 

대제사장입니다. 베드로는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를 위해 같이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들이 없다고 유대인들에게도 말했고 오늘 제자들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33,36) 그런데 아직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가 주를 따라가겠다고 목숨을 놓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말을 들은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기는 커녕 부인 하리라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없을까요?

 

 

구원입니다. 천국의 길을 내는 일입니다. 결코,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자신 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없는, 사람의 손으로 공로로, 열심으로, 수고로, 각오로 하지 못하는 문제는 천국의 구원, 영생의 문제입니다. 길은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스스로 반석이 되셔서 지팡이로 자신을 쳐서 죽는 그래서 생수를 내는 일입니다. 아무도 법괘를 손으로 만질 없듯이 구원의 길은 예수님만이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를 위해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가 길을 가겠다고  하니 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구원의 문제는 각오한다고 열심을 다한다고 목숨을 바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되신 예수님만이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혼자 가셨고 대제장의 직분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길을 믿음으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감격하며 감사하며 기쁨으로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죽기를 각오 하고 주를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말하는데  주를 부인한다고 하셨을까요?  

 

 

첫째, 믿음과 열심은 다릅니다.

 

오늘 베드로의 고백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열심입니다. 한번 은혜받고, 한번 어떤 기적과 환상을 보고 결심하고 각오하고 열심을 낸다해도 그것은 아직 살아 있는 자신의 열심이고 뜨거움입니다. 열심은 우리를 결국 부인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베드로의 죽기를 각오하고 목숨을 버리겠다는 것은 결국 자기 열심입니다. 열심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열심은 믿음 안에 있어야합니다. 열심은 성령 안에 있어야합니다. 성령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열심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말이 더욱 성격적이라 여깁니다.

 

열심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어진 단어로 거의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사람의 열심>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 하나님이 진중 지휘하시는 구원의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베드로를 아시고 하신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2]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안에 있지 않으면 죽기를 각오하는 열심, 뜨거움, 열정은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열정의 방향입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하는데 예수님은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믿음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겠다 하시고 돌이킨 후에 일은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 하지 않고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십니다. (22:32) 그리고 오늘 베드로가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신 말씀 전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를 사랑보다 서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주를 사랑하면 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럴때는 믿음입니다. 아닙니다. 주를 위해 죽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는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면 <나의 계명> 지키라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 

 

 

주를 위해 죽겠다는 각오는 서로 사랑으로 증명 되어야합니다. <서로 사랑> 증명되는 않는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억 해야합니다.  명령을 기억하고 것이 없다 자신의 재산과 물질을 다른 사람을 놓아 하나된 공동체를 세운 것입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우리의 주를 향한 목숨을 놓는 방향이 하늘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야합니다.  구원의 문제, 순교의 문제는 주께 있습니다. 주가 불러야 하고 주가 허락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주의 문제를 자꾸 우리는 나의 열심, 나의 열정, 나의 뜨거운 어떤 것으로 채우려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문제와 문제를 구분 해야합니다.

 

 

주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봅니다.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방향을 잡고 가는 사람은 많이 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일수록 <서로 사랑>에는 감각이 없습니다. 내가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하는 주를 향한 목숨을 놓는 열정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서로 사랑>에는 감각 없는 우리를 만납니다.

 

 

주를 위해 수백, 수천, 수억을 드리는데 옆에 있는 작은 자에게는 하나님이 하시겠지 하는 믿음 좋은(?)고백으로 손을 놓지 못합니다. 수백이 아니라 아니 수만 아니 천원도 놓지 못하는 이상한 신앙이 되었습니다.

 

 

주를 믿기에 주를 위해 목숨을 놓기에  삶도 주를 위해 놓는 믿음을 <서로 사랑>으로 증명해 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베드로를 다시 찾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은 것은 나를 위해 목숨을 놓겠느냐가 아닙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양을 치라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방향을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많이 다른것 같습니다. 주를 사랑하기에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는 것이라기 보다 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 주님의 작은 자에게 나의 사랑을 증명해 내는 것이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향한 부인하리라는 말씀 전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제자임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

 

 

 

예수님은 나의 열정과 나의 열심을 주를 위해 증명하라고 하지 않고 세상에 증명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므로 <모든 사람> 알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열심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 하지 않는 곳에는 오직 < 부인> 남습니다.

 

 

 

 

셋째, 사명은 주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주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은 주를 위한 어떤 막연한 신앙적 열심이 아닙니다. 주를 믿는 믿음은 서로사랑으로 증명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명은 사람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양을 섬기는 것입니다. 양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그래서 주신 사명은 양을 먹이고 양을 세우는 거십니다. 주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아야지 나의 열심이 남고 나의 공로가 남고 나의 열정이 남으면 결국 < 부인> 됩니다.

 

 

우리의 주를 위한 목숨을 버림에 대한 신앙을 돌아봐야합니다. 주를 위한 다는 명분으로 헌금은 많이 하는데 정작 힘든 사람을 위한 물질의 사용은 없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것만큼 사람을 채우고 사람을 세우고 서로 사랑하는 것에 물질이 사용되여합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일일이 구분해서 수는 없지만 시간과 물질의 사용에 있어서 반반씩 해야 한다는 것이 생각입니다. 헌금의 금액과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금액이 반반이어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와 성경을 읽는 시간만큼 사람과 함께 보내고 나누고 세우는 일에 동일한 만큼의 에너지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언젠가부터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 부인> 개인의 영적성장 측면에서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의 열심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를 위해 죽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서로 사랑에 대해서 너무 무지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예수님을 통해서 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아계심은 우리를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리입니다. 목숨을 사명! 사람이 빠진 신앙과 열심은 결국 < 부인>으로 갑니다.

 

 

아무리 주를 위해 목숨을 건다고 각오하고 결심하고 살아도 구원의 길은 내가 만들지 못합니다. 아무리 주를 위해 생명 바치겠다고 헌신해도 사람을 향한 <서로 사랑> 없는 어떤 헌신도 열심도 결국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맹세입니다.

 

 

평생을 달려왔는데 < 부인>으로 인한 허무함만 남지 않습니까? 목숨을 다해 주를 사랑해야 한다고 모든 바치고 왔는데 가슴에 허전한, 외로움만 남지 않습니까? <서로 사랑>입니다.  '서로' 주목 해야합니다. 서로입니다. 가까운 아내, 가까운 남편, 가까운 자녀와 내가 아는 사람과  '서로'사랑하는 것입니다.

 

 

< 부인> 이유는

<서로 사랑> 부재입니다.

 

 

 

* 오래된 사진입니다.
사진은 오래되도 고가구는 오래될수록 좋습니다. ^^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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