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용 당하는 사람 (요13:18- 38)
예수를 나를 위하여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어떤 것,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내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하고 내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한다고 했습니다. 다 예수님의 이름입니다.(마7:22)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인데 무엇인 문제입니까? 다 자기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목적이라 했습니다.
목적이 자기의 영광인 사람은 하나님도 이용하고 예수님도 이용합니다. 오늘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한 후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유다가 나가고 난후 바로 말씀하신 것이 영광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32)
세상이 자기의 영광을 위해 나아가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거두십니다. 세상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높아지고자, 믿는 자를 이용하고 죽이면 하나님은 그 세상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믿는자의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롯유다가 처음부터 자신의 뜻과 세상의 영광을 위해 온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삼년 동안 수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 기적을 보여주고 믿음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광에 붙들린 사람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도, 그분이 구세주이고, 내가 그분이 하나님임을 알아도 더 높은 영광을 얻기 위해 그 사람을 이용합니다.
기억해야합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이 가롯유다를 이용합니다. 더욱 강하게 가롯유다를 이용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몰랐나요? 그들이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들이 믿음이 없었나요? 아닙니다. 세상의 영은 그렇게 강하고 단단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람을 이용합니다. 하나님이 가롯유다를 버린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가롯유다를 강하게 역사한 것입니다.
그 세상에 이용당하는 미끼는 바로 영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롯유다가 나가고 난 후 바로 영광으로 그 일을 마무리 하십니다. 말 그대로 군중은 아직 먹고 배부름을 향해 좇아갑니다. 거기에는 영광이라기보다 자신의 배부름이 신입니다. 그러나 조금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면 여지없이 사단은 영광으로 미끼를 삼아 세상의 영은 누구든지 이용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 세상이 이용하는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벌이는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영광을 거두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믿는 자의 낮아짐입니다. 발을 씨기는 삶입니다. 그래서 가롯유다가 있는 가운데서 발을 씻기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보여야하는 것은, 세상에게 알게 해야하고 하나님이 세상으로 영광을 얻으시는 방법은 발보다 못한 저들에게 아니 발가락 때만도 못한 저들에게 발을 씻기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그들과 우리는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내가 발을 씻어야 할 같은 사람이지만 나는 은혜에 이용당하고 그들은 세상에 이용 당하는 것입니다. 열한 제자는 은혜에 이용을 당하고 가롯유다는 세상 영에 이용을 당하는 것입니다. 다 발을 씻고 다 더러운 인간들인데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미끼를 조심해야합니다. 세상의 영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이용하려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유혹합니다. 세상의 영이 예수님께 시험했던 같은 방법으로접근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이용하는 것은 다음 세가지 입니다.
첫째, 자신의 배를 먼저 부르게 하라고 합니다.
내가 가진 능력과 힘과 지식으로 자신의 배를 먼저 부르게 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첫번째 유혹이자 미끼입니다. 내 배가 먼저 불러야지 다른 사람도 돌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것을 채우는데 급급합니다. 보통 군중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은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먼저 자신, 먼저 네 자신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둘째는 세상에 기적을 보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고 알아주고 존경하고 박수치고 우리의 지도자로 삼으려는 어떤 것을 보이라고 합니다. 소위 성공신화입니다. 소위 사람들이 이르지 못하는 길입니다. 남들이 없는 재주, 남들이 하지 못하는 위치와 결과입니다. 그것을 이루고 나면 사단은 여지 없이 세상의 중심은 너라고 합니다. 네가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섬김의 주체가 아니라 섬김의 대상으로 살라고 유혹합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고 대접을 받고 변두리가 아니라 한 가운데서 주목을 받으라고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영이 이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주인공 자체에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참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게합니다.
마지막은 영광입니다. 자신의 영광입니다.
세상의 영광으로 끊임없이 유혹해서 세상의 영에 이용당하는 사람이 되게합니다. 동기를 이용합니다. 영광을 미끼로 삼습니다. 모든 세상을 다가질 수 있는 것처럼 영광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이런 세가지 미끼를 통해 세상의 영은 세상 누구든지 유혹하고 미끼를 던집니다.
가롯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방법은 정 반대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먼저였고, 기적의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은 하나님이라고 그래서 자리를 늘 피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가롯유다가 나가고 난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가룻유다는 세상의 영에 붙잡혀 있습니다. 이 세가지 미끼에 걸려 있으면 내 눈앞에 하나님의 아들이 있으면 그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일어서면 더 높이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도 팔고 죽이고 이용합니다. 마지막 목적은 자신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사단이 미끼를 던졌던 세가지 유혹의 뿌리에는 <만일>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가지를 유혹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놓친 것, 사단이 던진 미끼의 뿌리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에 이용 당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그 믿음이 흔들리면 우리는 하나님이 채우실 것에 대한 믿음을 잃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가장 자라기 아니라 한 가운데를,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대화의 뿌리에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으로 맞섰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마지막 결론을 <사랑>으로 맺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
이용하는 사람, 세상에 이용 당하는 사람이 없는 것, 절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두 가지 입니다. 발을 씻는 것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용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 유일한 울타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행동에 옮기고 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가 사랑하게 됩니까? 누가 발을 씻어 줄 수 있습니까? 내가 사랑하고 내가 발을 씻을 줄 때 하나님이 더 많이 사랑하시고 더 많이 나의 허물을 덮어주시고 용서하셨단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지금의 지금의 수고를 통해 하나님이 더 많은 믿음의 열매를 주실 것이라는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있는 사람만 발을 씻고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뿌리는 믿음입니다. 사랑의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을 먼저 원하셨지 사랑을 먼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을 먼저 확인하셨고 그리고 마지막에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다고 보면 맞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믿음은 뿌리라면 사랑은 열매입니다. 소망은 가지입니다. 믿음의 뿌리를 통해 소망의 가지를 지나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로 안다 했습니다. 뿌리를 보기 위해 땅을 파지는 않습니다. 뿌리를 보기 위해 가지를 꺾어 보지는 않습니다. 뿌리와 나무를 알려면 열매를 보면됩니다.
사랑이라는 열매는 소망이라는 가지를 너머 믿음이라는 뿌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라는 뿌리에 기적이라는 가지를 통해 영광, 자기 영광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뿌리가 다르니 열매는 당연히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이 원하는 자기 영광이라는 열매를 위해 달려가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열매를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 나무의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자기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을 지나 소망의 가지가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랑의 열매 한번 맺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세상에 이용당해서 자기의 영광이라는 열매를 향해 달려가던 그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내려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 열매가 나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
그런데 오늘 베드로가 주를 위해 죽겠다 합니다. 그렇게 살겠다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주를 위해 죽겠다고 했는데 결심했는데 왜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할까요? 왜 결심한대로 살지 못할까요?
내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