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어떻게 돌리는가?
(요12:44- 50)
도대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까?
이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회복 12편에 기록을 했고 한번 올린적이 있습니다.
참고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성령과 관련해서 몇가지 짧은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자 먼저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결론은 없습니다. 왜요? 사람에게는 영광을 돌릴 어떤 근거도 힘도 영광도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어떤 선도 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통해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 합니다.
우리에게는 영광을 돌린 어떤 것도 없습니다.
다 부패하고 다 그릇되어서 돌릴 영광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영광이됩니까?
그것을 알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는지 알아야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영광을 돌리나요?
<들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49-50)
예수님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유일하게 스스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자의로 말한 것이 결코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람이 영광을 드러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지휘하시고 보여주시고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은
오직 <순종>입니다.
그러나 그 순종의 전제는
오직 <들음>입니다.
그래서 영광의 다른 말은 들음이라고 이미 글을 올렸습니다.
듣지 않는 순종은 없으며 순종 없는 영광을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은
<자의적 영광>이 아니라
<순종적 영광>입니다.
우리의 실수는 결과가 좋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결코 그럴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들음이 없고 들음이 없는 결과는 악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좋아도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연애인이나 어떤 사람이 큰 업적을 쌓고 마지막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한마디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가?
사람들은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것이 결코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자의적 영광과 순종적 영광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마디도 한 기적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없는 곳에는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판할 수 있는 권세도 힘도 자격도 되지만 그분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것이 <자발적 순종>입니다.
세상에 오시는 것도 자의적 영광에서 자발적 순종이 될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우리는 뭔가를 자꾸 이루려합니다. 그래서 철저히 자의적으로 일하고 자의적 영광을 위해 수고합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러러 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내가 이런 일을 했고, 내가 자식을 잘 키우고, 내가 이런 직장에 다니고 내가 이런 일을 했다고
내가 이런 사역을 만들었다고 자꾸 자의적 영광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것이 자의적 영광의 목적입니다.
<자기>입니다. 자기가 목적입니다.
<사람이 영광을 드러내는 법>
그 <자기>에 철저히 죽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
결코 자기가 없는 순종적 영광, 자발적 순종 속에서 사역하시고 숨쉬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입니다.
우리에게 자의적 영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법을 수 없이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것이 있지만 특별히 광야에서의 삶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구름과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영광의 상징입니다.
길을 잃은 이스라엘에게 길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 기둥과 함께 계셔 먼저 행하시면 이스라엘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이 행할 길을 비추셨습니다.
모든 구약의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방법은 하나님이 먼저 행하시고 그들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어떤 일을 해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말씀을 통해 길을 보여주시고 그 길을 따를 때 사람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방법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스스로 영광스런 분이시나 사람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법을 철저히 겸손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자의로 말한다고 합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요7:18]
듣지 않고 말하고 듣지 않고 행하는 사람은 자의적 영광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교회 일도, 어떤 삶도 듣지 않고 행하는 것은 결국 자의적 영광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참 영광은 오직 들음에서 오는 영광이요 자발적 순종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성령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가시고 보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 보혜사가 오셔야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듣게 하고 알게 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럼 그 성령이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마음입니다.
마음에 계십니다. 다른 곳에 계시지 않고 마음에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머리에도 역사하시지만 마음에 역사합니다.
가슴을 뜨겁게 하고 환란과 핍박을 넉넉히 이기는 뜨거운 가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음과 뜨거움을 함께 주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상징인 성령의 임재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께 영광이었듯이 성령의 사역의 핵심은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님처럼 살게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방법이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셔서 우리로 순종하게 하셔서 친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사역 중 하나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44-45)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을 깨닫게 하고 보게 하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상호 보완입니다. 그것이 삼위일체의 함께함입니다. 삼위일체의 영광 돌림의 법칙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듣게하고 보게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깨달은 것을 들은 것을 행하는 순종적 영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리 뜨거워도, 아무리 귀한 업적을 가져도 이 순종적 영광이 없는 결과는 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의적 영광의 사람이 됩니다.
다들 참 열심히 합니다. 다들 참 귀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만나고, 그런 사람을 볼 때 마다 스스로 돌아봅니다.
<자의적 영광>인가 아니면 <순종적 영광>인가?
자의적 영광을 구하는 사람의 열매는 다 세상적 비교의 결과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순종적 영광의 대부분은 사람일 경우를 적은 경험이지만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의적 영광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영광이요 순종적 영광은 결국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영광인데
그 순종적 영광은 사람과 관련된 열매를 주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돌아보고 스스로 고민 해야하는 것은 자의적 영광과 자발적 영광의 차이는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바로
<들음>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듣지 않고 행하지 않았고 말씀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자의적 영광과 순종적 영광의 가장큰 차이입니다.
성령께서 구약에서 보여준 그림자로서의 광야와 가나안을 생각해야합니다.
광야가 좋습니까 가나안이 좋습니까?
이스라엘의 광야는 사십년의 방황입니다.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한 훈련으로서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정복의 시간입니다.
누리는 시간입니다. 어디가 좋습니까?
저는 성령이 인도하고 순종하는 곳이 좋습니다.
아무리 광야여도 자발적 순종이 있는 곳은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의 생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의적 영광을 구하던 가나안은 죽음의 도시 파멸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환경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우리는 오직 들음을 통한 자발적 순종으로 순종적 영광에 이르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오늘 무엇을 들어야할지를 생각해야합니다.
듣지 못하면 영광은 결국 나의 몫으로 돌리게 됩니다.
기도는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듣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 제목을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뜻을 듣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아니면 우리는 변함 없이 자의적 영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픔은 성령의 들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마음속에 계신 성령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이 두려워지고
사람이 두려워지면 성령의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곳이 광야인데 우리의 마음은 늘 가나안에 있습니다.
사단은 늘 풍요를 구하게 되고 우리는 풍요의 유혹 때문에 하나님께 묻는 들음의 공간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결국 나의 소리만 높이다 기도의 시간을 다 보내고 맙니다.
성령은 우리가 들을 수 있을 때 언제든지 말씀할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끈질기게 우리에게 말씀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50)
우리는 듣지 못하면 영생을 날마다 놓치고 살고 있습니다. 듣지 못하니 영생의 기적이 없습니다.
생명의 은혜가 풍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외롭고 허전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훈련해야 할 것은 사회에 잘 적응하고 사람들 속에서 잘 관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령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되어야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배운 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는 움직임에 민감한 훈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운 태양에 혹독한 추위에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듣기를 포기하고 살까요?
왜 우리가 성령의 음서을 좇아 영광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할까요?
생사의 문제가 걸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돈을 벌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역이 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밥을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혹독한 절망이 가장 명확한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생사의 갈림길 앞에 가장 명확하고 선명하게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생사의 문제가 아니어도 그냥 평범한 날에,
아무일이 없는 날에 생사가 갈라지는 영생의 문제로 여기고
그분의 음성에 들음의 길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영광은 들음입니다. 듣지 않고 행하는 모든 것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의적 영광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심이 아니라 열림입니다.
내 마음을 그분의 음성을 들을 마음의 열림입니다.
제발 열심을 내려 놓읍시다.
영광은 열심이 아니라 주시는 음성에 오직 순종적 영광을 향하여 오는 것입니다.
듣고 행하는 것이 많습니까 아니면 내 결정에 따라 행하고 말하는 것이 많습니까?
단 한마디의 말이라도 듣고 외쳐야합니다.
단 한번의 행함도 듣고 행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 비밀을 알지 못하니
결국 내 영광이 되고 하나님은 아픔이 됩니다.
영광!
우리에게 없는 단어입니다.
오직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 그분의 영광 그분이 거두십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의 법칙입니다.
*오늘 수빈이의 3번째 생일입니다.
지키신 하나님, 키우신 마눌님, 함께한 동역자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