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받아야한다. (요12:37- 43)
(사단의 전략 2)
예수님은 사역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적 교회성장적 차원에서 그분의 사역은 실패한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을 수없이 베풀었지만 그는 번번히 사람들을 피해다니셨고 사람들의 외면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믿지 않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해도 사람들이 왜 믿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37)
예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일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과 섭리를 이 땅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못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는 믿지 못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3)
사람이 믿지 못하는 이유를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분문은 명확하게 말합니다.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구하면 거기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거두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44)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심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거두려는 세상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싸움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려는 세상의 영입니다. 이미 사로 잡혀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도록 만든 그 세상의 영광 그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어떤 말씀도 기적도 사람을 살리는 능력도 밉고 싫고 죽이려합니다. 이 땅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오직 두 종류의 사람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피조물은 오직 두 종류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위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영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아담을 자기에게로 이끌어 간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사단의 전략 두번째를 생각해 보도록합시다.
"복 받아야 한다" (사단의 전략 2)
기억할 것은 사단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어떻게 이용할지도 잘 압니다. 사단의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자신의 영광입니다. 과정이 어떠하든지 마지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한 세번째 시험은 세상의 영광, 자신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주는 전략은 고통과 핍박이 아닙니다. 풍요와 성장과 발전입니다. 사단의 전략은 그리스도인에게 풍요와 성장을 줍니다. 자기 발전과 자기 성장과 사회적 풍요와 기적을 얻게 합니다.
첫째는 기적을 보고 따르게 합니다.
기적이 있는 곳에는 늘 사람이 모입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의 본질은 영광입니다. 기적을 가진 사람, 기적을 보여준 사람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 때문에 그 영광을 누리고자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따르는 것입니다. 주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주목은 자신의 영광으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시험에서 돌이 떡이 되게 하는 시험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할 경우 자신은 높아지고 자신은 배부르고 사람들이 몰리게 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것이 결국 자신의 영광으로 간다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내건 명분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만일이라는 것 속에는 많은 것이 있지만 '만일'은 자신이 영광의 한 가운데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잡게 하는 허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만일'이 업습니다. 예수님의 단어에는 만일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다이지 '만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영은 우리에게 '만일'로 접근합니다. 내가 이런 기적을 좇고 내가 이런 놀라운 업적을 이루고 내가 이런 놀라운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자리에 이르면 이라는 '만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만일은 우리가 잡지 못할 허구입니다.
둘째, 기적의 주인공이 되게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는 겁니다. 네가 기적의 주인공이 되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공신화, 목회신화의 주인공이 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고 다른 사람이 이루지 못한 업적을 얻게 하고 덩달아 경제적 부와 인맥도 상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가 세상의 영이 준 것인가는 마지막에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어릴적부터 교육을 받고 세뇌를 받고 세상으로부터 일등을 강요 받고 그래서 비교를 통해 세상의 영광과 자신을 비교함으로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들이 군중입니다. 군중의 심리는 자신이 기적의 가운데 있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그 기적의 주인공으로 한번 살고 싶은 욕심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권력과 힘의 중심에 자신이 한번 서보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리지요. 기적의 한 가운데 서는 그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은 그래서 하나님을 이용하게 합니다. 그 자리에 서기 위해 하나님도 예수님도 교회도 사람도 다 이용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중 중에 일부만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 세상의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런 사람입니다. 세상의 기적, 세상의 한 가운데서 스스로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여기고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40)
죄인의 친구, 세리의 친구인 예수님이 오늘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고침 받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본질은 세상의 주인공들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영과 본질상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신의 영광을 따르는 삶만이 존재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어떤 누구라도 그것이 진리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도 사라져야 하고 죽여야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비교라는 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영광을 대조하게 합니다. 다윗과 사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구약에서 보이신 영광의 비교, 세상 영이 사용하는 비교의 영광입니다. 한번 이 비교가 찾아오고 영광의 비교가 찾아오면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합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자신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움입니다. 그래서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측량 못 할 은혜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 세상에 죽는 것은 결국 마지막의 자신의 영광 앞에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싸우신 것은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은 특별히 그것을 많이 기록하고 대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왕 삼으려 할 때 변함없이 홀로 산으로 가셨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기적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이 가장 잘 사용하는 영광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아니 우리를 죽이는 가장 매혹적인 선악과입니다. 선악과의 핵심은 자기의 영광입니다.
셋째, 그래서 그 기적의 주인공이 되면서 세상의 영이 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고 하나님처럼 살게 합니다.
하나님처럼 착각하고 하나님처럼 산다는 핵심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내 말에 좌지우지되고 말한 대로 이름이 붙고, 내 말에 세상이 움직이는 상태가 되었을 때 사단은 찾아와 하나님처럼이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 군중은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삽니다. 그래서 기적의 주인공이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처럼 삽니다.
세상이 내 말에 움직이는 때를 위해 살고 그 때를 사단은 도와주고 힘을 주고 길을 열어줍니다. 눈감아 줍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하나님의 은혜도 다 받게 합니다. 뜨거운 신앙도 목회적, 사역적, 세상적 모든 은혜를 다 받게 합니다. 세상이 아담의 말에 따라 움직인 것처럼 그렇게 되도록 도우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세상의 영이 마지막에 노리는 한마디가 있습니다. '하나님처럼'입니다. 네가 하나님이다라고 한마디만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정말 하나님이 된줄 알고 왕의 자리에 앉아 이전보다 못한 사람이 됩니다.
마지막 <한 껀>입니다.
세상은 믿음도 가지고 기도도하고 세상적으로도 성공하라고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단은 한 껀만 노립니다. 한껀만!
그 한 껀은 바로 스스로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인생의 복을 얻은 것으로, 자신의 성공과 축복과 풍요가 자신으로부터 온 것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 한 껀을 위해 사단은 모든 경제적 성장과 지위와 부와 존경과 칭찬을 다 허락합니다. 그것이 현대 사단의 전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껀 올려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돌리게 합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은 이 핵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1장을 이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의 것을 비교하는데 다 사용합니다.
선악과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선악과를 먹게 하는 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영광의 싸움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다 아담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노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도 손대지 않습니다. 그것을 손대면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다 허락합니다. 자리도 주고 권력도 주고 돈도 주고 명예도 줍니다. 한국교회에게 성도에게 모든 것을 다 허락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한껀만 노립니다.
네가 하나님 자리에 앉으라. 너의 축복이 너의 능력이다. 너의 자리가 네가 수고해서 온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이 너의 힘이다. 그 한마디 하려고 그래서 선악과를 먹게 하려고 그래서 사단은 우리의 모든 복을 다 허락합니다.
한국의 큰 교회 담임목사님들이 수 많은 성도와 교회의 외적 성장과 몰려든 사람들 속에서 이 마지막 한껀에 다 넘어갑니다. 자신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평생을 살지만 마지막에 그 영광의 자리에 살짝 자기가 앉아 지금까지 돌린 영광을 다 자기의 업적으로 돌립니다. 당연한 대우, 당연한 존경, 당연한 섬김을 요구합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영광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하나님의 축복을 다 받으라고 합니다. 다 얻고 기도하고 노력하라고 합니다.
<복을 받으라!> 그것이 사단이 우리에게 주는 전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마디 던집니다. 네가 정말 능력이 있다. 다 네가 한것이지, 네가 실력이 있고 네가 땀을 흘렸고, 네가 수고해서 한 것이다. 네가 잘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의 수고의 열매, 자기의 영광만 남습니다.
산에 올라갈 때는 많은 도움을 구합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쉴 것. 그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산을 올라가려 노력합니다. 올라가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산 꼭대기에서 자기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려합니다. 그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빛이라고 합니다. 빛의 의미는 밝히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것! 무엇을 밝히나요? 빛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입니다. 그 영광의 빛을 자기의 영광으로 돌리는 순간 어둠이 됩니다. 하나님의 빛은 오직 하나님이 드러나야 하는 빛인데 자신의 빛으로 삼으려하니 어둠입니다. 그 어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사람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악함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빛이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는 빛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회복은 자신의 영광을 향하던 길을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는 길로 바꾸어야 참 생명이 있습니다. 그 길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빛을 비추십니다. 자신의 영광만 위해 살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여주시는 분이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심판도 안 하신다 하셨습니다. 자신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이 참 빛이 할 일입니다.
우리는 빛입니다. 길을 잃어버려 자신의 영광을 위해 달려가던 우리에게 빛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빛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사는 우리에게 조명하심으로 우리의 실체를 보고 돌이켜 깨달아 하나님의 영광으로 다시금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빛은 나를 보게 합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 기적 옆을 서성거리고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모든 것을 이용하던 그 헛된 영광을 보게합니다. 참 빛은 예수님입니다. 참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 보게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구원 얻은 것으로 우리의 목적이 이룬 것이 아니라 참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참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핵심은 영광의 싸움입니다. 빛의 조명은 자기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의 길의 조명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영광의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처럼 산다는 깊은 의미입니다.
그럼 어떻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어떤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내일 하겠습니다. ^^
* 파송 받기 전날 남천교회 마지막 주일예배 설교입니다.
영광을 묵상하며 여기에 올 때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어떻습니까~~~?"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나의 구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