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상식 영적인 상식 (요12:20- )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세상입니다.
상식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상식으로 살려하고 하나님은 상식으로 살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세계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려해도 보지 못하는 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 죽으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광이랍니다.
죽어야 영광이 된다는 말도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죽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합니다. 생명을 잃어야 얻고 자기의 생명을 미워해야
영생하도록 보전하신답니다.
이것이 세상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인 상식입니다.
한 알의 밀이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씨앗이 죽지 않고 그 안에서 생명이 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랍니다.
죽어야 생명의 열매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적 상식은 절대 영적인 상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영적인 상식을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기 위해 구약의 수 많은 역사와 인물과 사건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신약은 구약의 발판 위에서 섰습니다.
신약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위에 섰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의 조명하심과 깨닫게하시는 섭리가 아니면 결코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성령을 바로 보내시지도 신약을 바로 펼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수백 수천의 시간을 지나 오늘 예수님께서 세상의 상식을 넘어 영적인 상식을
만드시는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십니다.
내가 이때를 위하여 왔다고 괴롭지만 그 일을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33년이 아닙니다. 330녀이 아닙니다. 3300년도 아닙니다.
태초부터 이때를 위하여 기다려오신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아니 세상에는 그런 지식도 지혜도 없으니 죽어야 영광이고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고 나의 생명을 미워해야 영생을 얻는 이런 영적인 상식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영적인 상식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에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12:28)
라고 하십니다.
죽음을 향해가는 삶이 영광스럽게 하셨고, 또 죽음으로 영광스럽게 하시다고 합니다.
세상적으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인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 영적인 상식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30)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 사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상식과는 절대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논리로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상식입니다.
영적인 기본입니다.
영적인 원리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영적인 원리를 상식으로 삼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죽어야 영광이고,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죽여야 열매가 맺히는 영적이 상식!
이 상식의 터위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의 가장 고상한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세상적 상식이 이제 배설물이 되었습니다.
세상적 상식이 영적인 상식과 비교할 때 수준 이하의 것이 되었습니다.
상식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교회 사역자를 모집하는 신문에 상식이 통하는 사역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본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상식인지? 무엇이 참 상식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세상적 상식의 조건과 이력을 요구하면서 단 한구절도 이 영적인 상식을 이야기하는 사람,
그렇게 사는 사람을 구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다들 그렇게 잘 살아서 그런 말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어야 영광인데 죽어야 열매인데 죽지 않고 영광도 열매도 구하려하는 세상적 상식으로 교회가 살려합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죽어 영광이고 열매인데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얼마나 사람을 모으고 얼마나 숫자를 늘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인을 잘 관리(?)해야 하는지는 수 많은 책들이 이야기하는데
영적인 상식을 보여주고 말하는 그런 상식적인 사람을 만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상식이 통하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비상식이 상식이 되고 말이 아니라 죽음으로 영광을 증명하고 열매를 보여주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전에는 어른들을 향하여 하는 소리일지 모릅니다.
나보다 선배, 나보다 먼저 사신 어른들이 그 대상이 되었는데
이제는 제가 그 소리를 고스란히 들어야 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위치가 되었습니다.
아픈 가슴으로,
부끄러운 가슴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는 비참한 마음으로 저를 향하여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보기 원하는 헬라인이 빌립과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 헬라인은 앞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들어올 이방인의 그림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영적인 상식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예수를 믿는 것,
예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6)
예수를 믿고 섬기고 따르는 것은
<영적인 상식>을 따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이 아니라 영적인 상식입니다.
그 영적인 상식이 삶의 원리가 되는 사람이
영적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들어올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을, 세상적 상식으로 세상의 것을 배설물이 아닌 가장 존귀한 것으로 여기고 살며,
내가 죽지 않고 남보고 죽으라하고,
내가 한 알의 밀이 되지 않고
남보고 땅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높아지려하고 나는 이름을 내려하면서
단 한번도 남들의 아픔,
남들의 고통에는 단 한번도 고민하지 않는 그런 상식은 버려야합니다.
죽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죽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위함이 아닙니다.
오늘 나를 향하여 돌을 던지고 오늘 나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오늘 나에게 침을 뱉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멀리 볼 것도 없습니다.
옆집 이웃에게, 함께한 동료에게, 한 가족에게
이 영적인 상식을 적용하면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거창한 비전도 놀라운 꿈도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어떤 것도 영적인 상식이 아닙니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고,
예배를 드리러 가다 원망들을 만한 사람이 생각나면 예배를 멈추고 손을 먼저 내 밀며,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기 전에
옆 집, 동료, 친구중에 원수가 된 사람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 미는 것이 영적인 상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적 상식으로 그들은 죽일 사람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며,
상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세상적 상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것은 세상적 상식이 아니라 영적인 상식으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영적인 상식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길 것을 믿음으로 믿고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6)
세상적 상식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을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세상 너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보고 사는 사람은 세상적 상식으로 살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상식으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상식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세상적 상식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의 영이 이끄는 사람입니다.
세상도 상식이 통( 通)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아무리 상식이 통해도 세상입니다.
세상의 영입니다.
하나님도 상식이 통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상대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세상의 상식으로 사니 세상의 영이 통하고
영적인 상식으로 사니 성령이 통하는 것입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영이 통하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영이 통하지 않으니 말이 통하지 않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자신의 영광을 구하다 창자가 터져 죽었습니다.
배가 터져 죽었습니다.
영이 통하면 사람들의 영을 배부르게 하지만 영이 통하지 않으면 자기 배가 신이 되어 터져 죽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 그리고 영적인 상식의 싸움입니다.
세상의 상식은 세상으로 통하고 영적인 상식은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믿음이지요.
믿지 못하면 보이는 세상 너머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상식으로 산 모든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상식도 믿음이 아니면 살지 못하는 곳에 세상입니다.
세상은 상식으로 말하려합니다.
그런데 그 상식이 배설물인 것을 영적인 상식을 알고 나면 깨닫게 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린 영적인 상식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은혜가 임하게 될 터인데
다들 세상의 상식으로 자기 스스로 귀하게 여기니 다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다 임금이 되었습니다.
다 왕이 되었습니다.
임금 되고 왕 되는 것이 너무 쉽습니다.
그냥 세상적 상식으로 잘 살면 왕이 되고 임금이 되고 하나님이 됩니다.
다들 이 맛에 죽지를 못합니다.
너무 달콤하고 너무 매력적이고 너무 아름다워보이는 이 하나님이 되는 임금의 자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세상의 상식을 놓치 못합니다.
영적인 상식이 싫어집니다.
그래서 미워해야 하나봅니다.
그래서 쳐서 복종해야 하나봅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는 봅니다.
이미 죽었는데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살았다고 설치는 꼴이 꼭 영혼 없는 강시 같습니다.
뭘 하는지도 모르고 본능으로 사는 그래서 생명의 역사도 생명의 기쁨도 성령의 열매도 없이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참 아픔입니다.
이런 모습이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영적인 상식으로 살아야 할 자리에서 가장 세상의 상식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답답합니다.
죽어야 영광인데,
죽어야 열매인데,
내 생명을 미워해야 하는데 두렵고 무섭고 아프고 그래서 죽는 것이 힘든가 봅니다.
밟으면 더 밟아주고 싶고,
미워하면 더 미워하고 싶고
무시하면 더 살고 싶은 무언가가 아직 내 안에 있어서 말씀 앞에 눈물만 흐릅니다.
죽었는데 또 강시처럼 본능으로 움직이는 나의 못난 자아가 오늘은 아픔입니다.
그러나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완전히 이루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 소망의 빛을 봅니다.
그저 따름만 있을 내 삶에 하나님의 선한 간섭이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미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에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생명의 부활에 동참한 백성으로 내가 아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믿음은 나를 볼 때 결코 오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직 다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를 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때 찾아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묵상하지 마십시오.
절망입니다.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어둠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그분만이, 생명의 말씀만이 묵상의 대상입니다.
헬라인 몇 명인 예수를 뵙고자 할 때 예수님께서 이 영적인 상식을 설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뵙고자 할 때 생명의 풍성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고자 할 때 영적인 상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각자의 삶에 이 영적인 상식이 통하는 믿음의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그것이 최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