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의 다른 증거는 <가지 않음>
(요12:12-19 )
나귀입니다. 나귀를 타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왕인데도 세상의 왕인데도 큰 가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십니다.
화려한 궁궐도 아닙니다. 거처한 집도 없고 타고 갈 가마도 없습니다.
그냥 나귀, 새끼 나귀를 타십니다.
지나가는 나귀를 즉흥적으로 타신 것이 아닙니다.
수 백 년 전부터 아니 수 천년 전부터 나귀를 타기로 작정하고
화려한 궁궐에 머물지 않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왕인데도 세상의 왕인데도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왕인데, 세상의 왕인데 나귀를 타니 참 멋있어 보입니다. 더 귀해 보입니다.
나귀 주인이 나귀를 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창조주가 나귀를 탄다는 것은 참 귀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즉흥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서 더 멋있습니다.
수 백 년, 아니 수 천 년 동안 준비하고 마음을 먹으신 일입니다.
그래서 더 멋있습니다. 더 귀해 보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겸손입니다.
겸손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세상의 법은 자꾸 높아지고 높아져서 하나님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 보란듯이 나귀를 타십니다.
세상이 구하는 영광과 다른 영광을 구하십니다. 그래서 멋있습니다.
내가 믿는 그분이 내가 아는 그분이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사랑하는 그분이 세상이 구하는
그 영광과 달라서 참 마음이 놓입니다.
세상과 같으면 나는 숨을 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높음과 섬김을 요구하면 또 마음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보란듯이 나귀를 타시고 겸손하게 나를 찾아오십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
나도 같이 옆에서 걸을 수 있고,
나도 같이 스스럼 없이 말을 걸 수 있고, 친구처럼 동무처럼 그렇게 인격적인 대화가 가능한
그런 예수님이 좋습니다.
만약 큰 궁궐에 살고 수 백 마리의 말과 마차에 있었다면
나는 또 절망 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세상의 가치로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도 죄인도 누구나 친구가 되는 그런 예수님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그것은 그냥 얻어지는 마음이 아닙니다. 배워야 하는 마음입니다.
결코 저절로 얻어지는 마음이 아닙니다. 가르쳐주시지 않으면 세상에서는 알 수 없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은 배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수를 배우셨습니다.
세상에 맞서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고 영혼을 회복하고 세상을 회복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그 법이 세상에 대한 겸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겸손입니다. 영혼에 대한 겸손입니다.
예수를 믿고 이 겸손을 알지 못하면 세상과 결코 다를 것이 없습니다.
높아지는 것이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천군천사와 함께 세상에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겸손으로 보내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말 구유에 보내셨습니다.
죄인들과 친구가 되게하시고 세리들의 친구가 되게 하시고
갈릴리 시골 소망 없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게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꾸 잊어버립니다. 겸손을! 하나님이 내 놓으신 세상을 이기는 법을!
겸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겸손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법은 겸손입니다.
왕으로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겸손으로 섬기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도 섬깁니다. 예수님도 겸손이라고 자신을 정의하고 나귀를 타시고 섬기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세상에서 높아지는 법이 아니라 겸손한 법을 배워야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배워야 할 회복의 길입니다.
세상에서 알 수 없는 것! 겸손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겸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게로 와서 배우라는 예수님을 만나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길을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 가야하는 이유는 양의 문이기도 하지만 배워야하는 유일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친한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높아지려 하지 않습니다.
만나면 만날 수록 낮아지고 더욱 낮은 곳으로 가고 싶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과 더 깊이 만난 사람일 수록 더욱 낮아짐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멀어질 수록 자꾸 내가 높아지는 법에 눈이 뜨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할 수 있다는 희망은 벌써 빛 바랜 나뭇잎입니다.
오직 그분을 만날 때 우리는 넉넉하게 겸손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나귀가 되어야합니다. 내 등에 예수님을 태우고 다녀야합니다.
떨어질 수 없는 그러나 나의 삶의 본질을 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합니다.
사람들의 환호가 나를 향한 환호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환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 환호가 나를 향한 환호로 생각합니다.
아니 자꾸 그렇게 듣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칭찬에 사람들의 높임에 사람들의 섬김에 겸손은
자꾸 강 건너 나룻배가 되어 둥둥 떠내려갑니다.
겸손! 예수님을 만날 때만 배울 수 있는 하늘의 마음입니다.
배워야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배울 것은 겸손입니다.
세상에는 없는 단어 겸손을 통한 섬김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에 물든 영혼들입니다.
겸손 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일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대상을 동반합니다.
겸손은 반드시 대상과 동행하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겸손은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성령께 물어야 할 오늘의 첫 질문입니다.
교만의 다른 증거는 예수님께 <가지 않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