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요12:1-11)
예수를 믿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나사로가 죽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를 믿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예수님이 죽는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예수를 믿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1절에서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았던 곳인 베다니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11절에서 그 베다니에서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11)
베다니가 유명해졌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살리셨고 그것을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2)
정말 예수를 전하고 싶으십니까?
죽으셔야합니다.
지금 있는 곳,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죽으셔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리시고 사람들이 나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사람들이 예수가 어떤분인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 내가 사는 곳,
지금 내가 살아 숨쉬는 그것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합니다.
함께 예수와 먹고 마시는 것을 보여줘야합니다.
그것이 가장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합니다.
수 많은 물자를 동원하고
수많은 능력을 동원하고
수 많은 방법과 프로그램을 통하여 예수를 전하려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으로 내가 살았다는 것을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일하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보여줘야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하는 방법입니다.
영입니다.
하나님의 생령으로 산 사람이
세상의 영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은 영원입니다.
세상의 영으로 사는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영이 나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간섭하십니다.
우리의 싸움은 세상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그 세상의 영이 내 안에서 죽어야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생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베다니>입니다.
내가 죽었던 장소여야합니다.
나의 자아가 죽고,
나의 욕심이 죽고,
나의 육신이 죽었던 장소에서 하나님을 믿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죽었는데 하나님이 살리셨고
그 하나님이 사람들속에 믿음의 영을 보내주셨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베다니가 되게 해야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약하고 병들고 외롭고
모든 욕심과 정이 죽었던 장소,
베다니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베다니를 중요하게 기록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빌립보 가이샤랴를 중요하게 기록합니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베다니는 죽었다 산 장소입니다.
빌립보 가이샤랴는 세상의 장소입니다.
황제의 도시,
황제의 이름을 기념하여 세운 황제의 도신 가이샤랴입니다.
가장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힘과 세상의 권세로 이름한 가이샤랴!
그곳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을 보입니다.
가장 세상적이고 가장 세상의 논리로 살아야 하는 그곳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십니다.
베다니와 가이샤랴입니다.
장소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는 현장,
내가 믿음으로 내가 죽는 현장에 있을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믿음의 역사는 없습니다.
다른 어떤 프로그램도,
다른 어떤 논리도
다른 어떤 방법도 우리게 세상을 이기는 길은 없습니다.
베다니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그곳이 믿음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죽었던 곳,
자신의 죽음을 고백하는 곳(가이샤랴)만이
황제의 논리가 아니라
황제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 됩니다.
사람들로 나의 능력을 증명하려 하지 마십시요.
사람들로 나의 힘을 자랑하려 하지 마십시요.
사람들로 나의 높음을 자랑하려 하지 마십시요.
그곳에는 가롯유다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는 믿음이 아니라 오직 나의 영원한 죽음만 기다립니다.
공허와 허무와 아픔과 실패와 좌절만 기다립니다.
사람들로 나의 죽음을 알게하십시요.
사람들로 나의 힘이 없음을 알게 하십시요.
사람들로 나의 낮아짐을 보게 하십시요.
그곳에 사람들이 모르는 믿음의 비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보게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으로 미련한 복음입니다.
죽었던 사람을 보게하는 것,
죽은 나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하나님의 길입니다.
<죽은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죽은 나사로입니다.
그리고 오늘 세상에 대하여 소망을 버린 마리아입니다.
두 사람은 형제자매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고 부활 하실것을 미리 보여주는 생명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리아는 향유를 발에 부어 그리스도 예수의 장사를 위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가정은 오직 그리스도만 높이는 가정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높임은 바로 죽음,
세상에 대하여 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은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산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은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오늘 기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머리에 붓지 않습니다.
<발>입니다.
완전히 허비합니다.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완전히 섬기는 것입니다.
발은 섬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신에 발을 벗으라 했습니다.
발은 완전한 섬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씻깁니다.
그리고 머리로 그 발을 닦습니다.
내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것은
나의 최고의 것으로 예수님께 완전한 섬김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최고를 나를 섬기는 도구로,
나를 자랑하는 도구로,
나의 이름을 내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나의 최고로 예수님의 가장 낮은 것이라도 섬기는 것이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높이는 것이 영광입니다.
집안에서 가장 낮은 하인이 발을 씻기는 것이 예법입니다.
그러나 오늘 마리아는 자신의 그 자리에 내려갔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에게 하인,
종이 된 것입니다.
자신이 종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에게 가장 천한 종으로 서지 않으면 예수님의 죽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꾸 고상하게 복음 전하고,
자꾸 내가 높아져서 복음을 전하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내가 가장 천한 종이 되고
내가 가장 낮은 하인이 되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할 때 그 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롯유다가 틀리지 않습니다.
가롯유다가 머리가 나쁘지 않습니다.
가롯유다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가롯유다가 문제인 것은
죽지 않은 모습으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니
예수를 따르면서 얻어지는 떡고물 때문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얻어지는 부산물,
즉 나귀를 타신 예수님 때문에
나귀가 대접을 받는 일들로 마음이 빼앗기고
마음이 자꾸 그것에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귀인 것을 잊어버리면 여지없이 우리는 가롯유다가 되는 것입니다.
가롯유다가 달리 가롯유다가 아닙니다.
죽지 않은 자아로
예수님을 따르면 결국 가롯유다 같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100%입니다.
세상에 죽지 않고 세상의 유혹에 죽지 않으면
여지 없이 아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이 저주가 되고
복이 악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주었던 세상,
가롯유다에게 주었던 돈주머니가
결국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떡고물이 된 것입니다.
그 세상,
그 돈주머니에 내가 죽어야 예수님의 이름이 나는데
그 세상과
예수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돈주머니 때문에
나를 통해 믿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죽은 나사로와
죽으시는 예수님을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고 향유를 드린 마리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나의 죽음을 알리는 것!
그것이 참 능력을 보게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았을 때는 세상에는 복음이 없었고,
내가 죽지 않았을 때는 내 주변에 믿음의 역사가 없습니다.
능력을 구하지 마십시오.
힘을 간구하지 마십시오.
오직 나의 죽어진 자아를 구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죽지 않으면서 구하는 모든 기도는 나의 높임을 위한 사다리가 됩니다.
죽은 소문이 나지 않은 곳에는 나의 높아짐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죽은 소문이 난 곳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진 것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자랑은 없습니다.
자랑치 말라했습니다.
바울은 어디서도 자랑치 말라했습니다.
그의 자랑의 유일함은 날마다 죽는 것이라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그래서 그는 자랑하는 유일한 것이 그의 약함이라 했습니다.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후12:5]
약함이,
부족함이,
하인됨이,
나의 죽음이 그리스도안에서 자랑이 됩니다.
세상으로 우리의 높음을 자랑하지 마십시다.
세상으로 우리의 날마다의 죽음을 자랑하십시다.
하나님의 복음은 프로그램도
어떤 사람으로도
어떤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죽음,
날마다 죽는 나의 약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뭘까요?
비교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죽지 못하게 하는 가장 강력함 힘으로 비교를 가져왔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이들이 아담 이후 하나님 앞에 첫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제사가 어떤 것이었냐가 아닙니다.
제사의 제물이 이렇다 저렇다가 아닙니다.
비교입니다.
비교로 말미암아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제사가 아닙니다.
사단이 그를 꾀인 것은 누구것은 받고 누구것은 안받고하는
비교의 마음입니다.
그 비교에 우리가 죽을 때 진정으로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의 죽음을 방해하는 사람이 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
가장 가까운 동료,
가장 가까운 친구,
가장 가까운 동 직종의 사람이 나의 죽음,
세상에 대하여 죽는 나의 수고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사단의 무기는
<비교>입니다.
묵상 글들을 통하여 수 없이 말하는 단어 <비교> 입니다.
비교에 죽어야 내가 죽습니다.
비교가 죽어야 가롯유다의 계산이 사라집니다.
비교가 죽어야 참 사랑이 됩니다.
그 비교가 죽지 않으니 동생도 죽이고
부모도 죽이고
형제도 죽이고
결국 자신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은 거짓말하는 자의 비교입니다.
그것에 우리는 너무 많이 속아왔습니다.
세상과 비교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과 비교하고,
그래서 좌절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그래서 더 높아지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왜 나를 이렇게 밖에 못만들었느냐고 하소연하는 자신을 만나게됩니다.
다 비교의 영에 속아서입니다.
우리는 절대가치로 만들어지니 절대영혼입니다.
그 영혼을 가치롭게 만드시고 사랑하셔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결국 또 비교에 물들고 비교에 영혼이 말라갑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악한 교육법은 비교하는 교육입니다.
가장 악한 말은 비교하는 말입니다.
경쟁하게 하고
서열을 매기고
그래서 초등학생부터 내 인생은 이류고 삼류고 소망이 없다고
일찍부터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고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사단의 전략에
에덴동산을 떠나면서부터 속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 자녀를 옆집 아이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우리 목사님을 다른 교회 목사님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인을 다른 교인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내 아내를
내 남편을 옆집 아내와 남편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나만 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나만 할 수 있는 그 일이 보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쓰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못 찾으니
그 사명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니
평생 비교에 멍든 가슴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심한 곳이 교회입니다.
베다니가 되어야 할 장소가
빌립보 가이사랴가 되었습니다.
평범한 장소 베다니가
죽은 사람 나사로가
장례로 슬퍼한 마리아가 새로운 영광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죽어진 장소 베다니가 있을 때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가 황제의 도시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권세를 부여 받는 장소가 되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소망 없음을 고백하고
내가 죽었다 살아나는 신앙의 흔적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릿 시냇가>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집>입니다.
<아둘람>입니다.
<베다니>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산이 아닙니다.
초막을짓고
영광을 보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일은 베다니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 없는 엘리야는 없고
아둘람 없는 다윗은 없으며
빌리보 가이사랴의 고백없는 베드로는 없으며
베다니 없는 나사로와 마리아는 없습니다.
당신의 베다니는 어디입니까?
성경은 오늘 이 베다니를 계속 지목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죽음의 흔적,
죽음을 기념하고 장사와 부활을 준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을 베다니 없는 나로 결코 세우지 않으십니다.
베다니를 지나야합니다.
그래야 십자가의 영광,
부활의 영광,
믿음의 영광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 순교한 파니 전도사가 교회 개척하러 드롱콥 교회에 들어 간지 8개월 만에
한 살도 되지 않은 파니 전도사의 둘째 아이가 천국으로 먼저 갔습니다.
그리고 파니 전도사도 무당의 총에 맞아 천국을 갔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교회를 믿음의 역사로 채우실 것을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묻힌 곳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가장 열악하고 힘든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죽음으로 세워지는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