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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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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11:45-57)

 

 

 

세상에는 종류의 사람이 있다 했습니다.

 

<믿는 사람>

<믿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 죽음과 관련된 상황 근처에서 찾아옵니다.

 

오늘 마리아를 위로 하러 왔다고,

나사로의 죽음을 맞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다가 나사로를 살리는 예수님의 일을 보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45)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믿음이 생기는 이유는 아픔과 슬픔과 병과 죽음 근처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세상에 길이 없어야 하늘의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세상에 소망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

자신의 힘과 자리와 능력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소망의 길을 싫어하며 싫어할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려합니다.

 

아예 소망의 싹을 잘라 버리려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3)

 

 

세상은 사람을 살려도 싫어하고

병을 고쳐도 싫어하고

아픈 사람을 위로해줘도 싫어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

자신의 자리,

자신의 힘이 빼앗길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48)

 

 

 

자신들은 한번도 아픈자를 고치거나

죽은 자를 살리거나

보지 못하는 자나

듣지 못하는 자나

걷지 못하는 자를 고치지 못할 뿐더라

위로는 고사하고 안식일에 고쳤다고 책망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다른 것에 반응 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

자신보다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람들을 세우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것에 세상에 속한 사람의 본성입니다.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시니 세상은 무조건 미워하고 싫어하고 죽이려합니다.

 

사람이 어떤 좋은 일을 하느냐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느냐도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고치고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자리입니다.

일로 얻어질 사람들의 유익이 아니라

일로 사라질 자신의 자리,

자신의 이익,

자신의 기득권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의 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세워지고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을 하면,

사람과 함께하면

사람을 받아들이면

내가 얼마나 손해를 보고

내가 얼마나 희생해야 하고

내라 얼마나 나의 자리를 빼앗기는지 생각합니다.

 

 

죽이려는 사람둘에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백성을 위하고 민족을 위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50)

 

 

그래서 그들의 반응은 백성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죽이려 모의합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3)

 

 

백성이 사는 !

나는 모릅니다.

 

민족이 사는

나도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손해보고

자리가 위태하고

내가 희생하고

내가 불편한 그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셔도,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도

우리는 싫어합니다.

 

답을 알아도 싫어합니다.

진리인줄 알지만 싫어합니다.

사람이 훌륭하고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는 것도 알고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하는지도 압니다.

 

그러나 안됩니다.

자리가 위태하고

위치가 불안하고

내가 희생하고 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 입니다.

 

 

하나님보다 무서운 것은 나입니다.

하나님보다 소중한 것이 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어도 되지만

자리는 버리지 못합니다.

돈도 안됩니다.

섬김과 희생과 봉사도 안됩니다.

 

그래서

<>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포기할 보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힘이 없어야 보입니다.

구원은 세상에 소망이 없어야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세상에 잡고 있던 것을 놓아야 누리는 것입니다.

 

 

답인지 아는데,

해야 하는지 아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

 

<> 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진 것이 없어야합니다.

그래서 나는 가진 재물이 없고

가진 지식이 없고

건강이 없고

나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친구도,

가족도

아무도 나에게 없다고 느껴질

예수님이 보이고

십자가를 존중하고

구원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것이

손에 잡고 있는 것이 예수를 죽이려 합니다.

 

나의 돈이 예수를 죽이려 하고

나의 권력이 예수를 죽이려 하고

나의 지식과 세상적 높음이 예수를 죽이려 모의 하는 것입니다.

 

 

자리가 높아질수록 위험합니다.

돈이 많이 수록 보지 못합니다.

보다 많이 가진 어떤 것이 자꾸 예수를 죽이게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예수가 진리고

예수가 정답이고

예수가 길인 것을 압니다.

 

그래서 싫은 것입니다.

 

 

모르면 죽이지 않습니다.

아니까 죽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진리고

예수님과 하나님과 복음과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믿으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포기 하지 않으면 그것이 오직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나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자꾸 내가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자꾸 자리,

출세,

위치,

내가 남보다 되는 것을 소중하다고 속삭입니다.

 

 

예수님의 번째 시험당한 것이 그것입니다.

돌로 떡이 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지 세상에 죄인들이 먼저냐?

먹고 배부터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번째 시험의 본질입니다.

내가 먼저입니다.

내가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포기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번째 시험에서 넘어집니다.

 

 

<내가 먼저>

 

그래서 희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세워줌이 없습니다.

 

천국의 공동체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야 천국이 회복됩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내가 먼저냐 네가 먼저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남이 있어야 회복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한,

존중과 존귀함을 받을 행복이 회복됩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가장 회복의 핵심은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은 하나님을 통해 절대적 가치를 만날 때이지만

하나님의 절대가치는

사람들을 통해 지속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

사람들에게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

사람들로 섬김을 받고,

존경을 받고,

별말 아니지만 귀한 존재로 세움을 입을

아무리 어린 아이지만 사는 것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하는 것이

자존감 세우기입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인간이 잃어버린 것은 자존감입니다.

삶의 의미없음입니다.

존재의 무가치입니다.

 

가치를 하나님을 만나므로 회복되나

하나님의 만남의 지속은 사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격려하고,

작은 말에 존중과 존경과 칭찬과 섬김을 채워야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질 사람은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르게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을 받고 있구나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발견하게 ,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주위 사람들을 통해 깨닫게

그때 사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시작하고,

인생을 시작하고

배우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존중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예수님의 죽음과 <> 이야기하다

존중감까지 왔냐구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회복의 만남을 통해 얻는 에너지를

사람들을 통한 존중감 파괴를 거의 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압니다.

하나님의 위로도 받고

하나님의 은혜도 받지만

은혜와 위로와 채움을 말라버리게 하는 것이

사람들로부터의 존중감 파괴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존중감을 심어 줘야합니다.

가까운 성도들,

함께한 사람들에게 존중감을 심어줘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대적 가치를 지속하게 해야합니다.

확증하게 해야합니다.

 

 

엘리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채움으로 까마귀로부터 먹고 사르밧 과부로부터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확인한 것은 과부의 말입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왕상17:24)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이나

확증은 사람들로부터입니다.

그래서 소명의 확인은 개인적 소명과 관계적 소명이 있습니다.

 

후에 엘리야는 

갈멜산으로 850 1 싸움을 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습니다.

 

 

 

이것이 중요할까요?

 

믿는 것과 믿게 하는 사람의 중심에는 자존감,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존중감을 많이 받고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우울증,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르긴 몰라도 자존감의 상처가 굉장히 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함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사람들도 섬기고 헌신하고

자리를 놓아야 하는 것도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자존감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지 못합니다.

나에 대한 충분한 채움을 외부로부터 확인한 사람이 외부로 채움을 흘려 보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므로 그것을 하나님으로 공급받든지

아니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는 영적인 채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세우는 영성입니다.

말은 그냥 소리가 아닙니다.

말은 소리를 넘어 능력이고

그것이 능력인 이유는

말은 말씀으로부터 왔습니다.

태초에 말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영혼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이 사람을 세우는 시작입니다.

자존감을 채우고

사랑을 채우고

채우지 못한 가슴과 영혼을 채우는 영이고 생명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말까지 왔냐구요?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입니다.

남매는 예수님께서 틀별히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특별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섬겼습니다.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하고 대화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 오면 특히 이집에 유하였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이들을 통하여 채움을 얻으셔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께 초자연적 은혜,

말씀,

소리로 예수님의 채움을 허락하셨습니다.

 

요단강의 세례와

변화산의 만남 후입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사람들이 들리도록,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절대적 가치로 인정하도록 소리,

말씀,

,

생명을 채우셨습니다.

 

 

우리가 자꾸

<> 갇혀서 살게 됩니까?

 

자꾸 우리는 자꾸

<> 집착합니까?

 

자꾸 나의 것만을 채우려합니까?

 

채우지 못한 가슴입니다.

허전하고 허무하고

뭔가를 이루고 채우고 가져서 허전한 가슴을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더더욱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에 집착한 이유가 뭘까요?

 

자리와 권력과 재물을 대신할 채움의 어떤 것이 안에 없어서입니다.

 

채움을 우리,

함께한 서로가 해야합니다.

 

존경하고

존중하고

섬기고

헌신하고

아름다운 ,

,

생명의 말로

그들의 채우지 못했던 가슴에

하늘의 것으로 채움을 시도해야합니다.

 

 

 

사람을 채우는 것은

,

생령입니다.

 

생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의 영은 말씀이고

말씀을 통한 우리의 교제가

사람을 다시 춤추게 있습니다.

 

 

시대가 많이 어려워진다고합니다.

 

다른 것이 어려워진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

영혼을 세우는 말의 부재입니다.

 

자꾸 잘못한 것만,

자꾸 부족한 것만,

자꾸 문제만 말하는 곳에는 더더욱 갈증만,

더욱 허전한 영혼만 남습니다.

 

 

가난해도

지식이 없어도

재물이 없고

능력이 없어도

우리가 행복할 있는 방법은

섬기는 채움의 말과 존중을 느끼게 하는,

스스로 사랑 받고  있구나라고 느끼는 섬김입니다.

 

 

 

우리 한번 보지 않겠습니까?

죽이려 하지 말고

죽이라고 한번 대접해 보는 것이.

 

모의 하지 말고

모여서 존중을 느끼도록 아름다운 섬김의 말을 해보는 것이다.

 

한번 제안해 봅니다.

구역이,

같은 교역자끼리,

함께 하는 동료들 친구들끼리

 

사람이 내가 사랑 받고 있구나

내가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느끼도록

칭찬하는 시간 가져보는 !

 

아니면 사람에게 편지라도,

찾아보면 좋은 ,

귀한 ,

아름다운 편지라도 써서 전달하는 !

 

 

 

행복할 같습니다.

내가 그런 듣고 그런 편지 받으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 수록,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일 수록,

알아도 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대신한 어떤 것이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내가 !

그들의 마음에 따뜻함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에게 약은 오직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