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11:17-32)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시면 무엇을 구하겠는가?
높은 자리,
많은 재산,
세상의 권세?
무엇을 구하겠는가?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상황에서 그의 누이 마르다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5)
예수님은 자신을 다르게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
자신을 부활이라고 생명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부활하시고 난 후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십자가 지기 전,
죽으시고 부활하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며 생명이라 정의 하신다.
그런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시면 무엇을 구해야 하겠는가?
부활과 생명으로 자신을 정의하신 예수님께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하겠는가?
<생명>이고 <영생>이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는
영생,
생명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 발생한 문제다.
그런데 생명을 잃어버리고 난 인생에게 예수님의 주시기 원하시고
예수님이 오신 자신의 정체를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정의하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 기독교의 문제는
생명에 대한 영생에 대한 확신이 삶으로 고백되지 않은 것이다.
정말 영생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믿는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에
부활과 생명과 영생을 전하는 자들이
가장 이 문제에 믿음이 없는 것 같다.
더 집착하고
더 소유하고
더 세상 것에 미련을 두는 삶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생명을 위해 오셨고
우리는 예수님을 세상에서의 삶을 위해 이용한다.
그래서 우리와 예수님의 대화는 늘 다른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고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이야기는 늘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하는 내용을 기록한다.
'에고 에이미~'라고 시작하는 이 '나는~ 이다'라고 하는 자신의 소개는 총 6개가 나온다.
[요6: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영생)
[요8:12]나는 세상의 <빛>이니 (생명의 빛)
[요10:7]나는 양의 <문>이라 (생명)
[요10:11]나는 선한 <목자>라 (목숨)
[요11: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생명)
[요15: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열매-영광)
떡,
빛,
문,
목자,
부활과 생명,
포도나무이다.
오늘 나사로의 죽음 앞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정의 하신다.
그리고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 한다고 하셨다.
한마디로 영생, 생명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한 여섯개의 단어들을 사건사건을 통해 풀어나가셨다.
떡은 오 천명을 먹이신 사건으로,
빛은 간음한 여인의 사건을 통해,
양의 문과 선한목자는 맹인의 눈뜨는 사건을 통해
부활이요 생명은 나사로의 죽음의 사건을 통해
포도나무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난 후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하신 다음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과 이야기의 결과가 어디로 가는지 아는가?
바로 생명이다.
모두 생명을 말하고 목숨을 말하고 영생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는 오직 열매를 설명하신다.
삶을 설명하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정의하시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유일하게
생명과 영생을 설명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주목 해야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무엇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가?
나의 뜻인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인가?
예수님은 오직 생명이다.
부활이고 영생이다.
그리고 열매,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다섯가지의 '나는~'을 통해
찾아온 것은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믿음이다.
모두다 믿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말씀을 찾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기적은 오직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믿음의 본질 속에 계신 예수님은 오직 생명과 영생에 대한 확신을
주시기 위함인 것을 기억 해야한다.
생명과 영생!
그것이 없는 기독교는 죽은 기독교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힘이 없고
우리의 신앙에 힘이 없는 것은
기도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예배가 없어서도 아니고
설교가 약해서도 아니며
섬김과 봉사와 전도와 선교가 없어서도 아니다.
다만 생명을 주시려는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고
그 생명이 내 안에 춤추지 않아서이다.
예수님의 본질은 생명이다.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부활하기도 전에 자신의 본질을 생명과 부활이라고 정의하신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오직 생명이다.
생명의 풍성함,
생명의 넉넉함,
생명의 확신이 없는 기독교는 힘없는 기독교이며
생명과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는 신앙은
오직 이 땅의 영광만을 구하는 초라한 인생이 될 뿐이다.
생명은 어디서 오는가?
생명은 오직 믿음에서 온다.
"네가 믿느냐? "
수 없이 예수님께서 던지신 질문이다.
생명을 여는 힘은 믿음인데
믿음을 가지는 힘은 나의 절망이다.
나의 소망 없음이다.
세상 것 잡으려 달려 나온 아담 즉 사람이
세상에서는 죽어야
믿음을 잡는다.
세상에 소망이 없어야 믿음을 잡고
믿음의 열매인 생명을 얻는 것이다.
죽어야 산다.
세상에 대하여
세상의 욕망과
세상에서 주는 모든 유혹에 죽어야
믿음의 눈이 열리고 생명의 확신으로 살아가게 된다.
세상에 산 자는 믿음에 죽은자요
세상에 산 자는 생명에 죽은자이다.
생명으로 살고자 하면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데(갈5:24)
세상 것만 구하는 우리의 기도에는 생명의 능력이 찾아오지 못한다.
생명의 능력 없는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타락할 가능성이 많은 종교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질은 높음을 향한 추구이기에
더 높아지려
더 가지려
더 힘을 소유하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을 이용하는 종교가 되기 때문이다.
그 세상에 가장 잘(?)죽으신 모습이 예수님이다.
왜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왜 나귀를 타시고
왜 머리 둘 곳도 없이 세상에서 사셨을까?
세상의 소망이 없어야
생명이 유지된다.
왜 사람들이 임금 삼으려 하자 산으로 도망(?)가셨을까?
왜 제자들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는 예수님 앞에서 자리다툼을 하였을까?
생명이 없는
세상에 죽지 않은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 숨 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임을 보여주시고
나사로를 살리며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죽은 자를 생명으로 다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됨을 보여주신다.
사단은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을 이용한다.
하나님의 복으로 잘된 사람들이 빠지는 오류는 조금 세상의 형통을 맛보면
더욱 큰 세상의 복을 구하게 되고
그 복이 없으면 하나님의 복이 없는 것처럼 신앙이 문제인 것처럼 인식하게 한다.
그것이 세상에 물든
죽지 않은 우리의 본성이다.
생명과 영생의 능력은
세상에 죽을 때 결국 발휘된다.
세상을 가지기 위해 뛰쳐 나온 아담의 길을
예수님은 세상에 죽기 위해 오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죽지 않으면 아담의 반복이다.
죽어야 생명의 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은
내가 그렇게 사는 삶이 부활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죽고
그래서 날마다 사는 것이다.
날마다 죽지 않는 곳에는
날마다 새로와 지는 생명이 없다.
우리의 한계는
어제,
아니 십 년 전,
아니 이 십 년 전에 한번 죽은 것으로
지금껏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이 없고
그래서 생명의 재 탄생이 없고
그래서 하늘의 능력이 없는 것이다.
한번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찾아오는 세상에 대하여
내가 죽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풍성함이 찾아온다.
여섯가지 예수님의 자기 정의중에 마지막이
포도나무이다.
가지는 붙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번 붙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붙어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한번 붙은 과거의 접붙임으로
다시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사는
포도나무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생명은 있으나
열매는 없는 이유는
지속적인 먹고 마심이 없는 생명의 부재 때문이다.
예수님의 목적은 생명이며 풍성함이다.
열매이다.
그 풍성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소유가 아니다.
내적 평안이고
희락이고 자비고 충성이고 온유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다.
생명은 반드시 열매가 찾아온다.
열매없는 이유는 내가 접붙임바 되지 못한 결과이다.
사역의,
삶의 크고 작음으로 생명이 증명되는 세상이다.
높고 낮음으로 생명이 평가되는 세상이다.
높고 낮음! 그것에 죽어야한다.
<비교>에 죽어야한다.
비교에 죽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다.
잘 나가고
이름이 나고
높임을 받고 하는 모든 것에 예수님은 피해다니셨다.
그곳은 피해야 할 자리이다.
그곳에 앉아서 하나님의 영광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다.
우리에게 이길 힘이 없다.
사람들의 높임,
자리, 권력에서 벗어나야 생명이 유지된다.
많은 사람들이 벗어나지 않고
그 자리를 향해 나아가니 그것이 아픔이다.
기도를
신앙을
믿음을 그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도구로 이용하는 기독교.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거기에는 능력이라고는 오직 자신을 높이는 능력밖에 없다.
그래서 참 기독교는 생명의 능력만 남고 아무것도 없게 된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다 나누고 베풀고 네 것 네 것이 없는
그러나 생명의 능력이 넘쳐나는 교회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하지만
모두 생명으로만 이야기 하셨다.
생명 없는 세상에 생명을 이야기 하는데
세상은 생명만 빼고 이야기한다.
영생 없는 세상에 영생을 주러 오셨는데
세상은 영생만 빼고 기도한다.
세상에 죽어야 생명이 유지되는데
세상은 한번 맛본 생명으로 평생을 살려하고
세상에 맛보고 맛들고 맛에 찌들어
더욱 썩어가서 다른 생명도 질식시키고 있다.
회칠한 무덤이고
평토장한 무덤이며
배가 신이고
자신이 왕이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기독교는 생명으로만 이야기하는 공동체이다.
믿음은 생명으로만 증명하는 것이다.
생명에 전부를 거는 사람에게
생명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참 기쁨이다.
예수를 믿고 잘되는 복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참 생명을 얻고 참 사랑의 열매는 누리는 것이라 가르쳐야 한다.
누가 예수 믿고 복 받는다 했는가?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참 복음은 예수 믿고 생명과 영생을 얻으라 해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고
생명 없이
자신이 왕으로
자신을 주인삼고 산 모든 것을 회개하고
오직 생명 없는 인생에 생명을 영생을 얻으라 외쳐야 한다.
예수 믿고 잘 풀리지 않으면 예수를 잘못 믿는 것으로
예수 믿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예수를 잘못 믿는 것으로
그래서 교회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고
직분도 받지 못하고
말도 한번 못하는 그런 교회가 세상 어느 곳에 있단 말인가?
다 사단의 전력이다.
다 사단의 작전이다.
예수 믿고 잘 되는 것에만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에만 현혹되고
복음의 본질,
생명과 영생은 이단들이나 외치는 소리로 전략시킨 사단의 전략에
오늘도 우리의 교회는 죽음의 몸부림을 하고 있다.
세상보다 더 비교하고
세상보다 더 높아지려 하고
세상보다 더 잡으려 하는
그런 교회!
거기에는 생명,
생명을 소유한 자가 갖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삶과 능력이 없다.
순서가 바뀌었다.
생명에 목숨을 걸 때
이 땅에서의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다 했다.
순서가 바뀌었다.
먹고 마시고 입고 나서 하나님의 이름을 내려 하니
더더욱 그곳에는 생명이 없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는
생명이다.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거는 그곳에
생명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좀 더 포기해야 한다
좀 더 버려야 한다.
좀 더 아파아 ?다.
좀 더 죽어야 그래야 생명의 싹이 움을 트는 것이다.
생명의 푸르름을 보기도 전에
생명의 열매를 보기도 전에
세상의 비교와 번영과 편함에
교회의 모든 푸르른 잎들,
교회의 생명들이 사그라 든다.
아 나의 지체들이여~
나와 함께 생명의 유업을 나눈 자들이여~
우리 생명을 붙들자.
우리 생명에 목숨을 걸자.
우리 생명 아닌 것에는 제발 죽어 죽어 오직 십자가만 보이게 하자.
그것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생명을 주신 이유이다.
*나는 사자다.
나는 밀림의 왕인가 밀림의 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