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자가 아닙니다(요10:1-21)
우리의 실수는 이 세상에 한 분밖에 없는 목자를
너무 많은 목자에게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은 한 분이어야 할 목자를
세상의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그래서 좌절하고,
그래서 낙심하여 갈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생명을 얻을 수도
풍성할 수도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그런데 우리는 자꾸 다른 목자,
다른 믿을 만한 사람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결과는 풍성하지 않음과
생명 없음으로 달려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너무 외롭고 아프게 됩니다.
우리는 목자가 될 수도 없고
우리는 생명을 줄 수도 없습니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우리를 주님께,
참 목자에게 인도합니다.
참 문은 그리스도이고
참 생명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사람을 목자로 삼아 의지하고 믿고 살아가는 모든 곳에는
아픔만,
슬픔만 남게 됩니다.
삯꾼이 달리 삯군이 아닙니다.
주님 행세를 하는 사람이 삯군입니다.
주님 행세를 하고 주님처럼 양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처럼 생명을 줄 수도
그렇다고 풍성한 살을 줄 수도 없는데 자꾸 자기가 주님 대신 양 옆에 있으려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처럼 옆에 있지 않고
주님께 가도록 해야합니다.
주님을 보게 해야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리게 해야합니다.
그것이 내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아픔입니다.
그래서 슬픔입니다.
자꾸 내가 주님 행세를 하려합니다.
자꾸 내가 주님처럼 양 옆에 있으려,
양 옆에 머물려합니다.
주님께 보내야합니다.
주님과 머물게 해야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맡은 일이고
양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목자는,
선한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 갈꺼면서
해결해 주지 못할꺼면서 자꾸 내 곁에 머무르게 하려합니다.
오직 주님입니다.
우리의 목자,
우리의 선한 목자는 주님입니다.
영원히 양 옆에,
영원히 그들의 길이 되어주시며
생명이 되어주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삯꾼이 달리 삯꾼이 아닙니다.
내가 목자가 아닌데 목자처럼 행세하는 사람,
그 사람이 삯꾼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리 즉,
세상적 두려움,
세상적 아픔,
세상적 외로움,
인생의 문제를 채우지 못할 걸 알면서 자꾸 자신을 따르라 하는 사람입니다.
나만 믿으라 하는 사람입니다.
나와 함께 가자고 하는 사람입니다.
아닙니다.
내가 아닙니다.
나는 못한다고
나는 안된다고
나는 아니라고 해야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선을 목자에게 가게 해야하고
그들의 발걸음을 주님께 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혹 나 때문에 참 목자를 보지 못할까
혹 나의 약함 때문에 선한 목자를 만나지 못할까
혹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인생의 참 목자를 보지 못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을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나를 볼까
혹 나에게 시선이 머무를까
혹 나 때문에 주를 보지 못할까
내가 너무 약한 것을 알기에
너무 허물이 많은 것을 알기에
내가 가진 부족함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기에 눈물인 것입니다.
인생의 답,
인생의 참 행복의 문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우리의 일은
그저 주님께 오는 많은 양떼를 나에게 맡겨주시면
그 양들을 주님의 꼴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꼴로 먹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것으로 치는 것입니다.
주님의 것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일은 주님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양은 주님의 것으로 먹이고 치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무익한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기에
내 것으로 먹이지 않았기에
주님이 주신 것으로
하늘의 것으로 나눠주기에 내 것이 없는 것입니다.
먹이고 치는 것이 내 것이라 여기는 순간
나는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
하늘의 만나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목자를 아는 맡은 자의 일입니다.
그래서 생명입니다.
참 목자는 하나님의 계명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5)
자신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8)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랑을 받습니다.
"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7)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목자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그분 때문에 양을 위하여 생명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삯군은 생명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위해 양을 이용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양들을 위해 생명을 드리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양을 맡은 자의 사랑을 받는 조건은
오직 생명을 드림입니다.
바울의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고백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주님이 맡기신 양을 위해 생명을 드릴 수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때,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십자가에 죽으실것을 말씀하실 때
동일하게 들린것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양들을 위해 생명을 드리는 자들의 것입니다.
그 생명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는데 드리지 못합니다.
이유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는 예수님은 참 사랑을 알았고
우리는 그 사랑을 잘 알지 못하고 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온전히 알때 우리의 삶도 생명도
그분의 양들을 위해 생명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입니다.
양을 먹이고
양을 치라는 주님의 음성은
주님의 온전한 사랑을 알때 그가 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삼년을 함께 지내도
주님의 참 사랑을 알지 못하면
베드로를 향한 참 사랑을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면
양은 먹이고 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그분의 참 사랑을 알지 못하고 하는 모든 것은 내가 삯군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삼 년이나 예수님과 함께 살아도 몰랐는데
이렇게 살아서 어떻게 주님의 참 사랑을 알고 내 생명도 양들을 위해 드릴 수 있는가?
주님이 아닙니다.
양입니다.
주님을 위해 생명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양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양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안에 양들을 위해 지금 자신을,
생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작은자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드리라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거룩하고 놀라운 큰 일에 우리의 삶을 드리라 하지 않습니다.
보잘것 없고
볼품 없고
길을 잃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런 작은 양들을 돌보고 함께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조건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큰 일이 아닙니다.
작은 일,
작은 양입니다.
그 작은 양,
길을 잃은 작은 양을 위한 나의 생명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자꾸 큰 것을 구합니다.
큰 능력,
큰 교회,
큰 사역,
큰 목회,
큰 목사…
성경을 아무리 봐도 그런 말은 없는데 자꾸
<큰> 이라는 말에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잃어버린 양입니다.
작은 자입니다.
<작은> 에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있습니다.
버려야 다시 찾습니다.
"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17)
우리는 큰 것에 나를 드렸다는 큰 명분을 위해 작은 일을 포기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작은 양,
보잘 것 없는 작은 양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 작은 것을 섬기는 생명의 드림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조건입니다.
주님이 그러셨기에
오늘 주님이 나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게 오는 많은 양들을 네게 맡기니 작은 나의 양을 위해 네 생명을 드릴 수 없겠니?"
세상에 살지만 주님의 길을 걷는 길입니다.
세상은 자꾸 큰 것 하라합니다.
주님은 자꾸 작은 것 하라합니다.
나는 아마 큰 목사는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능력도 없지만
자꾸
<작은>이라는 말씀만 들립니다.
내가 아는 작은 자들 생각에 오늘도 생각이 많아집니다.
아픔이 많아집니다.
내 눈에 눈물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