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서 보일까요 보이니까 믿어질까요? (요9:35-41)
믿어서 보일까요 보이니까 믿어질까요?
오늘 눈먼 자가 눈을 뜨고 다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질문합니다.
눈뜬 자가 인자가 누구냐고 다시 묻습니다.
예수께서 너와 이야기하고 보고 말하는자 라고 하니
그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합니다.
믿어서 보일까요?
보게 하니 믿어질까요?
우리는 내가 믿어서 본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믿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도록 하셨기 때문에 보는 것입니다.
길을 가는 중에 보지 못하는 자를 불러서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아브라함이 믿어서 부름을 받았나요 믿어서 부름을 받았나요?
우리가 믿기 전에 먼저 부르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믿을 수 있는 자리,
믿음의 자리를 먼저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이미 결정이 난 것입니다.
그것을 단지 사람이 모를 뿐입니다.
보게하시니 믿습니다.
보여주시니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고 믿나요?
아닙니다.
예수를 알게 하시니 믿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은 우리편에서 확증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믿을 여건과
장소와 사람과 환경을 만드셔서 그냥 그분의 양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알고 부르시니 그냥 소리가 들리고 보이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이고
그것이 축복입니다.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이미 들어온 자,
이미 들은 자,
이미 보이는 자는 그저 절하고 감격하고 따름이 있을 뿐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 믿어서 따르지 않았습니다.
부르셨으니 따를 뿐입니다.
다만 예수그리스도를 명확하게 알아가고 더욱 우리의 삶을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뭔가요?
보고도 알고도 듣고도 따르지 않는 우리의 삶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모르면 몰라도,
보이지 않으면 몰라도,
들리지 않으면 몰라도
보고,
듣고,
아는데 따르지 않고
그분을 통해 생명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알아도 헌신하지 않고
보고도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
깨달아도 그분이 아닌 자신에 매여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반항하고 버텨도 됩니다.
그것은 믿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보게하셔야 보게되고 믿게 하셔야 믿게 되는 것입니다.
부를 때 그분의 양들은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믿고 난후가 더 문제입니다.
보게하셨고
믿게 하셨고
듣게 하셨는데
우리는 보지 못한것처럼
듣지 못한 것처럼
알지 못한 것처럼 사는 것이 더욱 문제입니다.
믿기 전에는 반항을 하고,
떼도 쓰고 해도됩니다.
왜냐하면 내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보고 듣고 알고나서는 그렇게 살면 이스라엘처럼 망합니다.
그래서 첫 사랑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시는 책망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보지 못하는 자가 보고 난 후에 예수를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를 만나자 믿고 절하고 따르게 됩니다.
그것이 믿고 난 후에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런데 믿기 전의 사람처럼 사는 것에 주님은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이스라엘을 향한 아픔이요 슬픔입니다.
보이고 들리면 믿어야합니다.
믿으면 따라야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따라 따르는 양은 오직 따름입니다.
그런데 들려도 보여도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슬픈 것입니다.
보여줘도
들려줘도
알게해도
예수님의 길을 가지 않는 수 많은 사람들을 향한 아픔이 오늘도 끊이지 않습니다.
믿을 준비는 우리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추수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할 일꾼,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했습니다.
준비된 자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믿게하는 준비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통해 주님을 알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추수꾼으로 부르셨는데
문제는 주님의 일을 해야 하는데
자신의 일에 매여
자신의 영광에 매여 일하지 않고
추수의 때를 허비하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일은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추수입니다.
그냥 추수입니다.
불러서 오는 자는 맡고
아니면 주님이 믿도록 만드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하지 못합니다.
다만 추수의 수고를 할 뿐입니다.
모르니 기도할 뿐입니다.
모르니 땀을 뿌리고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미 보인다면
이미 들린다면
우리는 알곡을 곡간에 들이는 일군입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일군입니다.
보이는데
들리는데
깨닫는데
나의 일에 매여 추수하지 않는 자는 첫 사랑을 잃은 자입니다.
교회는 복지기관도,
NGO도,
구제기관도 아닙니다.
성도는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정도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도 해야하지만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사명은
영혼을 주님께 부르는 일입니다.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믿게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믿게 하신 자들에게 주님의 음성을 들리게는 해야하고
주님께 오도록 알기는 해야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그것이 주님의 사람들이 해야하는 일입니다.
평생가도,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도
이 일,
영혼을 부르는 일을 하지 않는 인생은
결국 자신의 영광,
자신의 일을 통해 자리를 탐내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신앙의 경륜이 더할 수록
이 영혼을 부르는 일에 신이 나야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영혼이 주님을 만나는 일에 전부를 걸어야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성도의
장로의 집사의 권사의
목사의 선교사의 일입니다.
착한 일 좀 했다고
구제 좀 했다고
봉사 좀 하고
섬기는 일 좀하고
식사대접에
돈봉투 좀 전했다고
교회 몇 개 개척했다고
우리의 소임을 다했다고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는 큰 건물도
성도는 세상에서 잘되는 것도 우리의 본질이 아닙니다.
보게 하신 영혼,
보게 하실 영혼들을 향한 부르심,
추수의 사명을 이루어 낼 때 하나님 앞에 할 말 있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주님의 마음을 회복합니다.
예수를 믿고 수년 동안 예수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터미널이며 역을 전전하며 수년을 맨손으로 복음을 전했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그때가 그렇게 행복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아름다운 행복에 몇 년을 살았습니다.
시간이 가고
집사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 이제 복음 한가운데 있습니다.
일은 많이 했는데,
믿는 사람은 잘 훈련했는데
내 손으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이 적어집니다.
그것이 오늘은 그렇게 마음이 아픕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은 추수할 일군으로 부르셨는데
주님이 나를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알게 하신 이유는
준비하신 영혼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인데,
내 손에
내 가슴에 그 영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가심과 보심의 현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판단은 많이 하고
정죄는 많이 하고
일은 많이 하는데
눈을 뜨게 하실,
눈을 뜰 준비가 된 영혼을 향한 부름이 없습니다.
설교도 하고
글도 쓰고
수 없는 교회일에 눈코 뜰 시간이 없는데
정작
목사가
선교사가 영혼 붙들고 복음 전하는 날마다의 현장이 없습니다.
그것이 내 사명이고
그것이 내 일이고
그것이 부르심인데
보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 손에 없습니다.
설교는 잘하고
일도 잘하고
행정도 잘하고
찬양인도도 잘하고
사람들을 잘 대접하는데
그런 것 다 한 영혼 구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어디다 쓰며
누구를 붙들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가심과 보심의 현장,
추수의 현장으로 가야합니다.
교회가 잃은 것은
교회의< 능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능력이 나타날 추수의 <현장>을 잃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
말씀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현장에서 가능합니다.
영혼을 만나는 현장,
그리스도를 말하는 현장,
생명을 전하는 현장에서
이 복음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잃은 것은 복음에 맞는 삶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니
복음의 현장이 없으니
자신을 높이는 현장만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영혼을 만나지 않으니
자신을 높일 영혼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을 높일 현장만 좋아하게 됩니다.
피 묻은 십자가가 내 손에 없으니
십자가의 열매만 먹으려합니다.
내 손에 피 묻은 그리스도의 피가 없으니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회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복음의 피가 현장에서 회복될 때 교회와 성도는 회복되고
살아나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길을 포기하니 한국교회가 힘이 없고
성도들이 삶에 능력이 없고
사역자에게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참 귄위는 우리의 손에 복음이 들리워지는 현장에 있을 때입니다.
참 삶의 능력은 복음에 맞는 삶을 살아낼 때입니다.
참 힘은 자신의 높음이 아니라 복음을 붙든 우리의 낮아짐입니다.
믿게 하실 사람,
준비된 자들에게 전할 복음이 내 손에 있습니까?
현장이 날마다 있어질 때 그분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약속이 오늘도 명확하게 들립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전할 때 함께하십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복음의 현장,
그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시급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