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데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데 보는 사람(요9:13-34)
눈을 뜬 사람만 압니다.
보지 못하다 보게 된 사람만 봅니다.
보던 사람은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던 사람이 눈을 뜨니 보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심판입니다.
심판은 보지 못하던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39)
죄 된 세상의 시작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던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본성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의 힘을 믿고,
자신의 자리를 믿고,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 세상을 예수님은 심판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보지 못하던 자는 보게 하고 보던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던 사람은 보게 되므로 스스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됩니다.
그래서 믿게 됩니다.
그러나 보던 자들은 예수를 눈 앞에서 봐도 믿지 못합니다.
자신의 지식,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을 믿기 때문입니다.
눈이 뜨여지면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입니다.
눈이 뜨여지면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그것이 심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했습니다.
들리면 심판이 적용됩니다.
그러나 들리지 않으면 이미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던 자를 보게 하므로 믿게 하시고
보던 자들은 자신을 믿음으로 하늘로서 온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믿음의 걸림돌은 자신입니다.
믿음의 걸림돌이 의심이 아닙니다.
믿음의 걸림돌은 자신입니다.
자신이 내려놓아져야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소망이 없다고
자신은 절대 무능하다고
자신을 믿던 모든 것이 포기되어진 사람에게 예수님의 빛이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맹인을 두고 여러 사람들이 논쟁을 합니다.
그 논쟁의 핵심은 예수님이 죄인인가 아닌가입니다.
죄인이면 어떻게 눈을 뜨게 할 능력이 있는가?
아니다 그가 죄인이다 그것을 논쟁합니다.
맹인의 아버지도 죽음이 두려워 아들이 고침을 받아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맹인,
눈을 뜬 사람은 하늘이 보이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면
어떻게 맹인이 눈을 뜰 수 있느냐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다시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조건은 우리의 열심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 없음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자신을 믿고
자신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능력이 하나님을 만나는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근거가 됩니다.
눈이 뜨인 사람과 뜨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목숨의 위협 앞에 담대하냐 그렇지 못하느냐입니다.
맹인의 아버지는 아들이 눈을 떴지만 자신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죽음의 위협 앞에 아들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눈뜬 자는 영적인 세상을 보게 되니 목숨의 위협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조건을 채우려 합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높은 곳에 오르려 합니다.
죄송합니다.
거기에는 하늘의 눈,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 없음,
나의 절대적 무능력에 대한 자각이 예수님을 일하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더 처절한 나의 무능에 대한 인식이 더욱 하늘의 눈을 뜨게 하는 방법이 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축복의 방법론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방법론은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심령으로 부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길은 하나님을 더 멀리 떠나게 하는 세상의 길입니다.
굳이 지나가던 맹인을 불러 눈을 뜨게 하신 이유,
그 사건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의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 소망 없음이
날 때부터 소망 없음이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일과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맹인이면 죄가 없고
본다면 죄가 그대로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
세상에 대하여 보지 못하는 것,
소망 없는 것,
절대적 무능력을 깨닫는 것이 하늘을 보게 하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이 보이고
세상의 길이 보이고
세상의 축복이 보인다면
우리는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
그것이 우리로 하늘을 보게하고
하나님을 보게하고
하나님의 길과 일을 보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통해 죽는 것입니다.
죽어야 사는 법을 세상에 만드신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고
물에서 죽음의 상징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 법을 살아 있는
그러나 죽은 것과 같은 맹인과,
간음한 여인과
우물가의 여인과
소망없는 갈릴리의 제자들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요가 영원히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소망 없음이 영원한 하나님을 보게 하는 복이 됩니다.
우리는 자꾸 세상의 부요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시대가 발전 할 수록 하나님은 멀어지고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세상의 부요가 올 때 기독교는 망한 것입니다.
시대가 발전 할 수록
이성과 합리가 발전하고 경제가 발전하고 사는 것이 편해질수록
세상에 대해 보지 못하는
소망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유가 있다 여기십니까?
이미 심판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여기십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었는데
산 것처럼 살지 말고 살았는데 죽은 것처럼 살아야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살리고 높이십니다.
그것이 이 땅에 세우시는 하나님의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