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심과 보심(요9:1-12)
우리의 일은 육체로 판단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된자에 대한 시각도 죄 때문이냐 아니냐,
스스로의 죄냐 부모 죄냐로 판단합니다
예수님은 판단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하늘을 모르고 보니 다 판단거리가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보니
다 판단거리 육체적 비판 거리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판단 거리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설령 날 때부터 소경 된자가 자신의 죄든 부모의 죄로 태어났든 판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자세입니다.
판단은 이미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사셨고 정죄도 아니하시겠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예수님을 보여 주는 본문입니다.
기적이아니미라 예수님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예수님의 본심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소경 이야기를 하다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그 에게서> 입니다.
소경입니다.
예수님에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녀>입니다.
판단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그와 그녀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존재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와 그녀는 판단과 정죄와 비판의 대상이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 아는 사실,
간음 하다 잡힌 여인,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모두 우리에게 판단과 정죄의 대상이지 더 이상도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의 시각은
오직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게 하기 위한 존재일 뿐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으리라"(5)
그래서 예수님에게 시간은 일할 수 있는 시간,
일할 수 없는 시간으로 구분됩니다.
우리는 때를 내가 뭘할 수 있는 시간, 없는 시간이지만
예수님은 <나의>가 아니라 <보내신 이>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입니다.
소경을 고친 것은 안식일입니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14)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말씀으로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진흙을 이겨 바르지 않아도,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고치시는 분입니다.
이유는 사람들이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논쟁을 만들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자리에서 고치지 않고 실로암못으로 가서 씻게하셔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려하는지 보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입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지
사람과 하나님을 위해 안식일이 존재하는지를
말씀하시기 위해 오늘 예수님은 일을 순종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죽을 고비를 어제 본문에서 넘기셨으나
또 오늘 논쟁 거리를 만드셔서 어려움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자신을 통해 문제 거리를 만드시는 분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통해 반드시 하나님의 뜻,
잘못된 사람들의 본질을 고치시려는,
잘못된 사람들의 삶의,
잘못된 우리의 생각을 고치시려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죄 지은 여인에 대해 육체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죄냐 아니냐로 판단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의 우월함과 우리의 죄없음을 증명하려하는,
우리는 저 여인과 소경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는,
모든 상황에서 오직 자신 만 드러내려하는,
자신이 깨끗하고 죄를 짓지 않고 다른 사람보다 잘한다는 것을
증명하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 없이 사는 우리를 고발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철저히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자세,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철저히 다름을 보여주십니다.
자신의 일 자신의 영광이 아닌
당연히 욕하고 정죄하고 판단 할 수 있는 두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그분의 의지와 뜻을 보여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자신의 판단과 정죄와 미리 생각하고 바라보는 시선을 그쳐야합니다.
어떤 말도 안되는 사람,
세상적으로도 소망이 없는 우물가에 만난 여인같이 여섯 남편과 산 여인,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날때부터 소경된 자와 같이
정말 가능성없는 사람을 판단도 정죄도 포기도 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시고 용서하시고 고쳐주시고
세상적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가치로 볼 때
그런 사람에게도 소망이 있게 하시는 것이
나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일을 할 때입니다.
세상에 어떤 상황도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일과 영광안에서 버릴 것이 없습니다.
어떤 막나니도 어떤 죄인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앞에
다 가치있는 이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포기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누구나>,
<언제나>입니다.
`보내신 이를 위해 일할 수 있는 때`로
자신의 삶의 시간을 정의 하신 예수님에게
<누구나>와 <언제나>가
허용되는 이유입니다.
어떤 상황도 어떤 사람도
우리가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 앞에 버릴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없는 것은 그 하나님의 보내신
<목적의식>이 없을 뿐입니다.
안된다는 판단과 정죄가 내 안에 찾아오기 전에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고 싶은 열망이 더 많아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하여>의 은혜입니다.
<그>와 <그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고 영광이 나타나지만
실제 예수님을 통하여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이제 내가 그와 그녀가 있기전 <통하여>가 되어야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일과 영광은
누군가의 <통하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통하여>가 되려면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일과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어야합니다.
그 열망을 통해
<통하여>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그 열망의 다름 이름은
<가심>과 <보심>입니다.
열정을 <통하여>를 이루지만
그것은가심과 보심의 열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1)
'가실 때' 그리고 '보신지라'가 예수님의 열정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열정이 없습니다.
'통하여'의 은혜가 나에게 없고
영광이 통하여를 지나 나타나지 않는 것은
가심과 보심의 열정이 없어서입니다.
가야하고 봐야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가야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봐야합니다.
가는 수고,
보는 수고가 없는 곳에는 결코 '통하여의 은혜'는 없습니다.
오늘은 주일입니다.
나를 위해서 가고 보지 않고
주의 영광을 위해 가고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열정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이고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심>과 <보심>!
모든 <통하여의 은혜>를 이룰 수 있는 열정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에게 회복될 것은 가심과 보심의 현장입니다.
현장이 없는 곳에는
돌에 맞음과 배고픔과 여러 위협을 감수하는 통하여의 은혜를 이루는
가심과 보심의 현장이 없는 곳에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은 없습니다.
다만 나의 영광 나의 일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 의 일 때문에 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보심의 현장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고 보는 현장이 없는 모든 우리의 삶의 마지막은
나의 영광이 됩니다.
나의 이름이 됩니다.
나의 이름 나의 영광을 이루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 때문에 가고 보는 현장이 없습니다.
요즘 신앙의 특징은 가심과 보심의 부재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가고 보는 현장의 부재입니다.
다 자기 현장입니다.
다 자기 즐거움의 가고 보는 것입니다.
하루중 단 한번이라도
나의 것,
나의 기쁨,
나의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때문에
불편해도 가고
귀찮아도 보며
목마르며 애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장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가고 보는 현장에 서야합니다.
그 현장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너무 깊은 고민,
너무 깊은 사색,
너무 깊은 묵상,
너무 깊은 생각은 현장에 가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영광의 그림자입니다.
고민과 사색과 묵상과 생각의 깊이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비록 아무 생각없어도
그분 때문에 가심과 보심의 현장에 서 있다면
하나님은 마른 막대기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지요.
아무도 가지 않은,
보고 싶은 않은 골리앗과의 싸움에
그는 갔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심과 보심의 불편한 진리가
하나님의 승리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일로 끝이 납니다.
작은 아이도 가라고 할 때 그 가심의 현장에 있을 때
기적을 경험하고
성령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의 꼬마제자 이야기입니다^^)
이상해도 알아듣지 못해도
가심과 보심의 현장은
크나큰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놀라운 축복으로 인도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을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고 싶어합니다.
어떤 청년이 선교팀으로 와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도 나이 들어 여기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남은 생을 다 바쳐야겠다. "
그 청년이 여청년인데 저한테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한국도 은퇴하면 나이가 많아 일 할 곳이 없어서 쩔쩔매는데
지금 젊을 때 안하고 나이 들어 선교하려고 한다는 것은
가짜다.
사회에서도 필요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도 싫어한다.
세상도 쓰레기 취급하는 시간을
하나님도 좋아하지 않는다.
가려거든 지금 가라.
하려거든 지금 해라.
누가 너의 미래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장을 하나?
내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남은 시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무슨 역사를 하겠는가?
하나님은 가장 좋을 때
가장 아름다울 때,
하나님은 가장 귀할 때 드리는 것을 좋아한다.
왜 하나님이 첫째를 좋아하는데,
왜 하나님이 귀한 것을 드리는 마음을 기뻐하는데!
열정은 내일이 아니다.
열정은 나이 들어서가 아니다.
가심과 보심의 현장은 지금 바로 여기 여야한다.
나이가 들던 젊든
지금 은혜를 주실 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가심과 보심!
하나님의 일을 위한 시작이다.
가지 않고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일과 영광을 위하여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 가짜다.
나는 성도들의 아멘과 청년들의 눈물을 믿지 않는다.
다만
<가심>과 <보심>의 삶!
그것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