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 (요8:31-47)
신비다.
예수님이 오늘 세상을 향하여 욕을 퍼붓는다.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도 아니요,
마귀의 자식이요,
마귀에서 나왔고,
너희 아비인 마귀의 욕심대로 행하고,
살인자의 아들이요,
진리가 그 속에 없어서 진리에 서지도 못하고,
거짓말을 하니 그 속에 있는 것으로 하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아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음란한데서 나왔고
진리도 모른다.
오늘 본문에서만 이야기하는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렇게 욕을 하면서 그들과 같은
마귀도 살인자도 진리도 없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이 아님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7)
이것 말고 다른 어떤 신비가 더 필요한가?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이것 한가지가 오늘 나로 춤추게 한다.
마귀의 자식인줄 알았는데,
마귀에게서 나온줄 알았는데,
나의 아비가 마귀이고 그 욕심대로 행하는 줄 알았는데,
살인자의 아들이고,
진리가 없어 거짓을 말하고,
음란한데서 행하고 진리를 몰라 자유 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주님은 명확히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신비다.
내가 듣고
내가 알고
내가 그분의 말씀을 말하니 이보다 더 놀라운 신비가 어디 있는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수님의 욕보다 더 욕을 먹어도 되고
마귀보다 더 마귀적이요
살인자의 아들보다 더 살인적이요
아브라함은 도무지 알지 못했었고
진리를 고사하고 내가 사는 삶의 의미도 몰랐으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의식도 못하고 살아온 삶인데
오늘 주님은 선언하신신다.
"내 말이 들리면 하나님께 속하였다. "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다.
그러나 그 진리의 자유의 혜택은 들리는 사람이 가진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1-32)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께 속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와의 구분이다.
일해서 믿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맞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니 열심히 다녀서 복음을 뿌리는 것이다.
믿음의 근거를 전하는 것이다.
세상은 더 세상 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더 하나님 사람 되게 한다.
예수님을 죽이는 이유는 그분의 말이 우리 속에 없어서 이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37)
어제도 말했지만
우리의 우리됨은
예수님의 예수님됨의 증거는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냐
아니면 들리는 말을 하느냐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이 세상을 만드셨다.
그 말씀이 힘이다.
말씀이다.
일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일을 한다.
우리는 세상적이요 마귀적이어서
일을 통해 일을 하려한다.
아니다,
말씀이 일하게 해야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하나님의 길이다.
그런데 세상은 일이 일하게하고
일의 결과를 자신의 영광으로 삼는다.
말씀이 일하게 하는 시작은
들리는 것이다.
들리면 오직 따름만 남는다.
그래서 무엇이 들리느냐의 문제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38)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듣고 본것이다.
그것이 신비다.
듣고 싶다고 듣는 것이 아니다.
보고 싶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보게하고
그분이 듣게하고 !!!
나의 노력이 들어가면 믿음의 법이 아니다.
왜 아브라함인가?
왜 모세인가?
모른다.
왜 나인가?
모른다.
다만 나는 들리는 것,
보이는 것을 듣고 말하고 행할 뿐이다.
왜 들리는가?
왜 보이는가?
솔직히 말하면 이유가 없다.
그저 들리니 듣고 보이니 본다.
이유가 있다면 그냥 들리고 보이는 것이다.
같은 곳에서 나지 않았으니 예수님과 세상은 싸운다.
세상은 예수님을 죽이려한다.
처음부터 마귀는 예수님, 하나님 나라를 뺏으려 왔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이 하늘로서 왔다하니
세상은 예수님을 죽이려한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7)
들리는 것!
보이는 것!
신비다.
온 세상이 다 아닌데
온 세상이 다 하늘에 속하지 않고 사는데
나는 오늘 들리고
나는 오늘 보인다.
신비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
신비다.
세상에 속했다고
마귀의 아들이라고 해도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 해도
뭐라 항변할 말이 없는데
들린다.
보인다.
그냥 신비다.
감격이다.
은혜다.
이 감격이
이 은혜가 내 안에 사라질 때
나는 사명이 사라진 의미 없는 인생이다.
오직 나의 영광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
보내신 자
말씀하신 자
듣게 하신 자의 영광
그것이 내 삶의 이유고 의미다.
신비다.
들리고 보이는 것!
그냥 신비다.
그래서 세상의 일은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의 일은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말씀을 들을 기회,
말씀이 찾아오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분주하게 하고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말씀을 고민하지 못하게 하고
말씀이 내 마음에 있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말씀을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오해하게 한다.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가지는 오류이다.
실수이다.
그래서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
자신을 위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도록 유혹했다.
사단은 말씀이 들리지 못하도록 하든지
사단은 말씀이 자신을 위해 사용하도록 힘쓴다.
말씀의 목적은 들리게 하고 스스로 일하게 하는 것이고
말씀이 들리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위해 사용하도록 한다.
그래서 말씀이 들리면 오직 순종만 남는다.
순종이 아니라 나의 열심이 남으면 말씀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 봐야한다.
진리를 말하는데 믿지 않는 이유는
진리와 같은 곳에서 나오지 않았든지
말씀이 내 안에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오면 말씀이 일한다.
일이 일하지 않는다.
그 말씀이 내 안에 있으니 그것이 신비다.
세상과 구분된 유일한 근거 한가지!
말씀이 내 안에 들린다.
모세와 아브라함,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리고 사도바울도 들리지 않을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세를 부르시고 아브라함, 베드로와 야고보를 부르셨고
사도바울을 부르셨다.
"바울아 바울아!"
세상과 구분되는 시작,
세상과 하늘에 속한 근거,
부르심과 들림이다.
오늘도 우리가 세상과 다른 이유는 말씀의 들림이다.
행하기 위해 일하면 세상이다.
들리는 것을 행하면 하늘이다.
일은 세상을 낳고
말씀은 생명을 낳고 자유를 낳는다.
말씀 없이 가면 짐이지만
말씀으로 가면 자유함이다.
들음!
신비다.
내가 들리는 것!
*둘째 다빈이입니다.
등촌교회 선교팀 청년들이 많이 보고 싶어 하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