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거울

거울
 

 

 

 

 

 

 

 

 

 

 

 

 

 

거울 (8:21-30)

 

 

 

 

 

 

없는 논쟁과 말씀과 대화에 예수님의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나를 보내신 ',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예수님의 특징은 오직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님> 입니다.

 

 

 

예수님의 특징은(최근 동안의 본문 중심에서)

 

첫째,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

 

둘째, 하나님의 말을 전하는 자입니다. 전달자입니다.

 

셋째, 그분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행위자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하는 거울입니다.

내가 행동하고 말하면 거울은 나의 행동과 말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것입니다.

본질의 말과 행동을 전달하고 행할 뿐이지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이땅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처럼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선하신 분은 하나님 외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님의 거울로서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성령>입니다.

 

 

예수님의 힘의 근거는 연합입니다.

삼위일체입니다.

하나입니다.

완전한 하나됨을 땅에서 그분은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완전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완전한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하는데

연합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의미,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신 의미는

우리가 필요할 ,

기도할 멀리 계시다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를 부르실 우리안에 연합하여 하나되어 함께 계시는데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은 우리가 필요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그분의 뜻을 듣고 보고 말하고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철저히 하나님의 회복의 영광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회복의 견인을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령이 오시는 길을 내셨고

성령께서 함께함의 역사로 우리안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필요한 것을 이루시는 영이 아니라

그분의 말과 행함을 거울로서 우리가 행하도록 견인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견인의 영이지

성령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영이 아니십니다.

 

우리 안에서 말하시고 행하게 하시는 성령의 본체를

연합함으로 하나되어 전하고 따르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그가 기뻐하는 일을 행하므로 혼자 두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

 

 

이상한 것은 어제 오늘 본문에서 그렇게 논란을 벌이고

논쟁을 벌이고

죽이려는 자들이었는데

오늘 말씀을 하시자 많은 사람이 믿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30)

 

 

우리에게는 그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하나님이 주시는 뜻을 행하면

망할것처럼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람은 뜻대로 해야 성공할 같은 꿈을 꾸지만 신기루입니다.

사막의 아지랑이입니다.

 

신기루가 아지랑이로 여기고

두려움 너머의 그분의 음성,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삶이 나의 기쁨임을 다짐해야 합니다.

 

보지 않으니 확신이 없습니다.

한번도 해보지 않으니 기쁨이 없습니다.

 

해보면 논쟁 가운데,

죽이려는 사람 가운데,

흩어지는 가운데

남는 사람,

찾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사막의 오아시스입니다.

 

 

오아시스를 향하여 사막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길을 떠나면 사막은 영원히 사막입니다.

그러나 사막에 샘이 흘러 넘치는 길은

그분이 원하는 길과 그분이 원하는 뜻을 행함입니다.

 

길과 뜻의 마지막이 오아시스입니다.

 

오아시스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종려나무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아시스와 종려나무와 깊은 지하에서 샘솟는 샘물 같은 사람은

그분의 뜻을 행하고 말하는 영원한 친구가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심한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

내가 판단하는 것을 판단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26)

 

 

 

예수님 조차도 말하고 판단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믿은 것은 자신의 참됨보다 하나님의 참됨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분에게 들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이 잃은 ,

세상이 회복해야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음의 최절정,

믿음의 종지부입니다.

 

십자가는 헌신으로 지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섬김으로 지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보상을 보고 지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작은 흔적들이 모여

십자가를 가는 확신,

십자가를 지는 능력,

십자가를 지는 하늘의 위로를 듣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하고 싶은 ,

오늘 내가 판단하고 싶은 판단을 아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점을 찍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사막의 한걸음을 딛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사막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막 가운데서 논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막 가운데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막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가나안,

오아시스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셨고

그래서 오늘 그분의 말을

그분의 판단을

그분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다른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증명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그림에 점을 찍는 것입니다.

작은 믿음의 점들이 모여 그림이 되고

인생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영원한 즐거움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서성이지 맙시다.

타는 듯한 갈증으로 함께한 사람들에게 목마름을 채워 달라고 하지 맙시다.

그들도 타는 목마름으로 서성이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믿음의 ,

믿음의 발걸음으로 오아시스를 향하는 만이

우리의 진정한 믿음의 걸음입니다.

 

 

우리 인생의 유일한 답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믿음의 걸음 속에

종려나무도

샘도

그늘도

푸르른 열매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막 같은 인생에 즐거움입니다.

예수님은 즐거움을 아셨습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