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믿음 (요8:1-11)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따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쓰러져가는 사람 더 밟는 것이고
죽어가는 사람 더 죽이는 것이고
법대로,
... 율법대로,
이성대로 합리대로 상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법대로, 이성대로,
율법대로 잣대를 재는 일에 살아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힘은 법입니다.
법대로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잊어버린것은 나도 그 법에 포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법에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의 헤아림으로 헤아리고 너희의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데리고 와서 율법대로 돌로치려하는 사람들에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물러가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십니다.
우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고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하십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15)
예수님은 육체적 죄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으신다.
그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신다.
그래서 알곡과 쭉정이를 판단하지 말라하신다.
판단에 대한 몫은 하나님께 맡기시는 것을 본다.
본인이 할말이 많고 판단할 것이 많지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긴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죄에 대한,
방금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도 정죄치 않는다.
한마디로 사람에 대한 구원 사역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판단과 말도 전부 하나님께 맡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구원에 관하여 사역과 내 삶에 대하여 비전에 대하여 십자가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이 물러가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십니다.
우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고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하십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15)
예수님은 육체적 죄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으신다.
그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신다.
그래서 알곡과 쭉정이를 판단하지 말라하신다.
판단에 대한 몫은 하나님께 맡기시는 것을 본다.
본인이 할말이 많고 판단할 것이 많지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긴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죄에 대한,
방금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도 정죄치 않는다.
한마디로 사람에 대한 구원 사역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판단과 말도 전부 하나님께 맡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구원에 관하여 사역과 내 삶에 대하여 비전에 대하여 십자가에 대하여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믿음을 가짐과 같이
사람에 대한,
사람에 대한,
죄를 짓고 악한 사람들에 대한 것 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나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범죄와 악함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믿음이다.
그래서 판단은 주께 맡김이 되야한다.
육체적 죄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기억할것은 육체적 죄를 짓지 않을것같은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사들을 향하여 수없이 정죄하신다.
이유가 뭔가?
육체적 죄가 더 악할것 같은데 율법으로 보면 돌로쳐죽일수 있는 심각한 죄인데
우리는 나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범죄와 악함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믿음이다.
그래서 판단은 주께 맡김이 되야한다.
육체적 죄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기억할것은 육체적 죄를 짓지 않을것같은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사들을 향하여 수없이 정죄하신다.
이유가 뭔가?
육체적 죄가 더 악할것 같은데 율법으로 보면 돌로쳐죽일수 있는 심각한 죄인데
왜 정죄치 않으시고 그 시대의 주류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는가?
육체적 죄는 단지 개인의 죄이다.
그런데 주류의 죄는 하나님의 자리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이 왕이되려하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죄를 짓기 때문이다.
아담의 죄이다.
아담의 죄는 개인의 육체적 죄가 아니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의 임금됨을 부인하는 죄이다.
믿음의 죄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죄이다.
예수님께서 문제를 삼으신 것은 믿음 없음,
즉 하나님을 왕으오 주인으로 인정하는 믿음에 대해서이지
죄인들,
세리들,
약한 자들을 향함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품으셨고
안아주셨고
이해해주셨다.
함께 먹었고
함께 나누었고
함께 걸었다.
그러나 허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자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화를 내시고 정죄하시는 것을 보게된다.
우리가 우리스스로 문제 삼는것은 작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내 삶의 구원자로 고백하며 살지 못하는 것이어야한다.
간음 한 것보다 더 큰 죄는
한편의 강도처럼 강도짓을 한것보다 더 큰죄는
사람들의 지탄받던 세리장의 악한 행실보다 더 큰죄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믿음없음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시며 자신의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자신의 주권과 권능위에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믿음의 삶의 증명이다.
우리는 자신에 관해,
자신의 미래와 구원과
자녀와 사업과 모든것에 대한 믿음은 고백하면서도
정작 죄지은 사람에 대해 믿음의 고백을 드리지 못함을 본다.
자신은 믿음의 법을 적용하면서
자신은 은혜의 법을 적용하면서
다른 사람은 율법을 적용하고
다른 사람은 믿음이 아닌 합리와 이성을 적용하고
다른 사람은 세상의 법을 적용하는것을 본다.
아니다.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믿음으로 고백하며 십자가를 가는 사람은
동일하게 죄지은 이웃에 관해 같은 믿음의 법을 적용해야한다.
은혜의 법을 적용해야한다.
그것이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는
믿음의 사람의 길이다.
예수님은 오늘 하나님을 믿음 대한 자신의 믿음과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을 같이 보여주신다.
자신이 죽을수 있고 죽이려는 사람들 속에서 전해야할 말씀을 전하며,
죄인에 대한 정죄치 않음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을 동시에 보이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에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과
다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이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동시적 믿음>이다.
욥의 이야기는 그 믿음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성경의 이야기이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집이 아니라 길게 쓰기가...)
육체적 죄는 단지 개인의 죄이다.
그런데 주류의 죄는 하나님의 자리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이 왕이되려하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죄를 짓기 때문이다.
아담의 죄이다.
아담의 죄는 개인의 육체적 죄가 아니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의 임금됨을 부인하는 죄이다.
믿음의 죄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죄이다.
예수님께서 문제를 삼으신 것은 믿음 없음,
즉 하나님을 왕으오 주인으로 인정하는 믿음에 대해서이지
죄인들,
세리들,
약한 자들을 향함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품으셨고
안아주셨고
이해해주셨다.
함께 먹었고
함께 나누었고
함께 걸었다.
그러나 허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자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화를 내시고 정죄하시는 것을 보게된다.
우리가 우리스스로 문제 삼는것은 작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내 삶의 구원자로 고백하며 살지 못하는 것이어야한다.
간음 한 것보다 더 큰 죄는
한편의 강도처럼 강도짓을 한것보다 더 큰죄는
사람들의 지탄받던 세리장의 악한 행실보다 더 큰죄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믿음없음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시며 자신의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자신의 주권과 권능위에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믿음의 삶의 증명이다.
우리는 자신에 관해,
자신의 미래와 구원과
자녀와 사업과 모든것에 대한 믿음은 고백하면서도
정작 죄지은 사람에 대해 믿음의 고백을 드리지 못함을 본다.
자신은 믿음의 법을 적용하면서
자신은 은혜의 법을 적용하면서
다른 사람은 율법을 적용하고
다른 사람은 믿음이 아닌 합리와 이성을 적용하고
다른 사람은 세상의 법을 적용하는것을 본다.
아니다.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믿음으로 고백하며 십자가를 가는 사람은
동일하게 죄지은 이웃에 관해 같은 믿음의 법을 적용해야한다.
은혜의 법을 적용해야한다.
그것이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는
믿음의 사람의 길이다.
예수님은 오늘 하나님을 믿음 대한 자신의 믿음과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을 같이 보여주신다.
자신이 죽을수 있고 죽이려는 사람들 속에서 전해야할 말씀을 전하며,
죄인에 대한 정죄치 않음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을 동시에 보이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에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과
다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이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동시적 믿음>이다.
욥의 이야기는 그 믿음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성경의 이야기이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집이 아니라 길게 쓰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