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 가는 조건(요7:37-53)
예수님께 갈수 있는 사람의 조건이 있다.
누가 예수님께 갈 수 있는가?
목마름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
목마름을 이야기하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이다.
그 여인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3-14)
그런데 왜 주님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로 돌아가셨을까?
불편하고 돌아가야 하는 길이다.
오직 한가지 이유다.
목이 마른 여인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인생의 갈증으로 목이 마른 여인을 주님은 일부러 찾아가신 것이다.
누가 예수께 갈 수 있는가?
누가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는가?
누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가?
인생의 목이 마른 사람이다.
오늘 명절 마지막 날 수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초청하여 부르신다.
외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마시는 조건은,
내게 오는 조건은
<목마름> 이다.
누구든지 초청을 하지만
조건은 반드시 목마름이다.
목이 마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께 오지 못한다.
아니 가지 않는다.
예수님도 찾아가지 않는다.
예수님은 인생의 목마른 자를 찾아가셔서 부르신다.
세리 삭개오를 찾아가셨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인생에 목이 말랐다.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돈이 있다고 목이 마르지 않음이 아니다.
돈이 없다고 다 목마른 것도 아니다.
어떤 조건에서도 예수님께 갈 수 있는 조건은 ,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조건은
<목마름>이다.
야곱이 태어날 때부터 작은 자가 크게 되고 큰 자가 작은 자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의 예언가운데 태어났다.
야곱이 라반의 집으로 갈 때 벧엘에서 꿈을 꾸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형 에서를 만날 때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서론도 없이 바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32:24)
왜 갑자기 이렇게 씨름하는 이야기가 나오는가?
목마름이다.
야곱은 인생에 목마름을 가진 것이다.
시작도 없고 서론도 없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목마름이 얼마나 심한지 하나님이 이기지를 못한다.
그래서 허벅지 관절을 쳐서 물러나게 했다.
하나님보다 야곱의 목마름이 이긴 것이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하나님이 정하셨고,
라반의 집으로 갈 때 꿈에서 약속을 받았지만
그가 정작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였다.
이유는 뭔가?
인격적 삶의 <목마름>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인격적 씨름을 하게 된다.
예언도,
꿈도 있지만 그가 없는 것은 인격적 만남이 없었다.
목마름이 왜 중요한가?
목마름은 우리를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으로 인도한다.
인격적 만남을 가지지 못한 어떤 목마른 인생도 생수를 마시지 못한다.
우리의 목마름은 하나님도 이기게 만드는
처절하게 절박하며
사무치도록 애통하며
인생을 넘어 하나님의 다리를 잡고 놓지 않을 만큼 질긴 아픔이
인생의 목마름이다.
그 목마른 인생들을 향하여 오늘 주님은 초청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
올 수 있는 인생의 조건은
인격적 삶의 목마름이다.
주님의 영원한 마르지 않는 생수를 먹는 조건은
인생의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다.
이 목마름이 우리를 생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광야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광야학교라고 한다.
아니다.
광야가 아니라
목마름이다.
광야를 지나다 죽은 사람이 너무 많다.
광야를 아무리 지나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에 살아도
처절한,
하나님의 다리를 놓지 않을 만큼의 절절한 사연으로 맺힌
목마른 인생의 끈질긴 애통은 하나님의 생명,
영원한 생수를 공급하는 젖줄이 된다.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이 아니라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는 길은
<목마름> 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목마른 절규의 몸부림이다.
우리에게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은
시리도록 부는 바람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목마름의 씨름이다.
목마른 만큼 주를 떠날 수 없고
목마른 만큼 주가 필요한 인생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다.
그 목마름을 다른 어떤 것을 채우려 허상을 붙들고 사는 인생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목이 마를 수 있음을 전제하고
명절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모였을 때 모든 인생을 향하여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한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잠깐 입만 축이는 것으로 내가 목마르지 않다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인생을 향하여,
육체의 배부름이 영원의 배부름으로 착각하고 하나님을 떠나
오늘도 허상을 향하여 인생을 허비하는 모든 인생들을 향하여,
남편 여섯을 바꿔도 채울 수 없는
목마름으로 우물가를 맴돌던 여인을 향하여,
오늘도 내가 그 목마름을 채울 수 있다 착각하고
주님이 아닌 나의 손에 뭔가를 잡고 채우려 달려가는
모든 인생을 향하여 주님은 오늘 터질듯한 심장으로
그 인생들을 향하여 소리치며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인생의 본질은 허무다.
인생의 본질은 높음을 향한 추구다.
인생의 본질은 외로움이다.
채울 수 없는 가슴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향하여
임마누엘로 우리의 인생을 다시 채우시는 약속의 하나님을 보여주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인생의 길을 자신이 갈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죽음의 비통한 각오의 심정으로 오늘도 외치신다.
"죽어가는 영혼들이여
채울 수 없는 가슴으로
오늘도 허무와 외로움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내가 너희를 마시게 하리라.
내 피를 내 살을 먹고 영원히 죽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영원으로 다시 태어나라"
라고 절규하듯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 음성이
이 주님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 영혼은
아직 목마름의 자기 진단이 내려지지 않은 인생이다.
목이 마른 자만이 들리는 이 음성,
목이 마른 자만이 알아보는 주의 음성,
길을 잃은 양만이 듣는 목자의 음성,
처절한 외로움에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인생의 밤에 들리는
생명의 음성,
그분의 소리가 오늘 들려야 한다.
스스로 나는 내 목을 축일 수 있고
스스로 나의 수고와 열심으로 내 인생을 채울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언젠가 만나게 될 영원한 목마름 앞에 절규하며 부르짖는 그 소리에도
"누구든지" 라고 제한 없이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돌아오게 된다.
채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미쳐가는 엄마를 살려달라고
부처인지 하나님인지 인식도 못한 어린아이가 부른
엄마를 살려달라는 하나님을 향한 처절한 목마름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셔서 오늘의 내가 여기에 있다.
초등학생이든지
죽어가는 나이든 영혼이든지
목마른 영혼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누구든지"의 전제로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목사가 아니다.
선교사도 아니다.
장로도 집사도 권사도 그 어떤 직분의 자리도 아니다.
부자도 아니고
가난함도 아니고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조건은 오직
<목마름> 이다.
오늘도 우리가 영원한 생수로 마르지 않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오직 <목마름>이 없어서이다.
육체의 배부름은 영혼의 목마름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다.
목마름이 없어서가 아니라
육체의 배부름의 감각이 영혼의 목마른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착각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의 만족은
영혼의 목마름의 감각을 죽인다.
영혼은 영혼이 느끼는 감각이 있다.
육체의 채움은 영혼의 감각을 무력화 시키는 가장 큰 병이다.
다 죽을 영혼,
다 선고된 사형수들이
감옥에 넣어주는 맛난 고기와
손에 쥔 돈과
감옥에서의 높은 자리로 선고된 사형의 심각함과 두려움을 잊게 한다.
그렇다고 그 선고된 심판이 없어지지 않는데 다만 잠시 채워지는 배부름이
심판의 감각을 상실시킬 뿐이다.
그래서 주님이 필요한 사람은 목마른 사람이다.
다 있어도 영혼의 구세주가 필요한 세리장 삭개오와 같은 사람이다.
높은 지위에 있어도 영생을 위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이다.
삭개오는 주님이 찾아오자 구원의 백성다운 삶으로 변화되었고
니고데모는 다 떠난 사람들 속에 유일하게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다.
목이 마른 사람이다.
인생에,
영혼에,
영생에 목이 마른 사람이 주님께 가고
주님을 떠나지 않는다.
배가 좀 부르면 목마름이 사라진다.
통장에 돈이 좀 모이면 목마름이 사라진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사람들이 좀 존경하고
내 일이 잘되고
내 자식이 잘 나가고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명예가 좀 쌓이면 목마름이 사라진다.
그때부터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
목마름 없는 인생은 예수님이 필요치 않은 인생이 된다.
그래서 배부름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한다
배부름은 영적 목마름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상실된 심령으로 그저 배부름이나 좇아가는 인생을 살다 어느 날 찾아온 목마름에
고통과 상실과 두려움으로 인생의 밤을 지나게 된다.
한국 교회와 한국의 현실은 목마름이 사라진 시대이다.
편안함과 안락함과 배부름이 인생의 목마름에 대한 감각을 상실케한다.
광야에 살던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렇게 부탁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가나안에서의 배부름이다.
교만은 다른 말로
<목마름의 상실>이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백성을 향하여 가장 두려운 것은 이 목마름의 상실이다.
육체의 편안함,
육체의 배부름이 결코
목마름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길을 막게 해서는 안된다.
육체의 교만으로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의 감각을 결코 잃어버리게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언제 잃어버리나?
예수님을 언제 알지 못하나?
목마름이 사라진 인생,
목마름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
목마름으로 눈물이 사라진 인생에는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이 없다.
예수님의 처절한 외침과
예수님의 뜨거운 심장이 없다.
가슴 저리도록 울리는 이 예수님의 외침
'누구든지 목이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처절한,
자신의 생명과 피와 온 육체를 다 걸고 외치시는,
죽음을 각오하고 명절에 올라고
목마른 인생을 향하여 외치는 이 외침이 귓가에
아니 내 심장에 울려야 한다.
그리고 이 외침은 우리에게,
목마른 심정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에 생수가 되어야한다.
그저 한 사람의 외침 정도로,
그저 한 선지자의 절규 정도로,
그저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그저 그런 소리로 들린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의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지 못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생명이다.
이것이 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이다.
이 외침이 목마른 인생에 유일한 답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왜 주님이 날 찾아왔는지
왜 교회를 다닌지 삼 개월 만에 주님을 만났는지,
왜 지금껏 주님이 날 붙드는지
천 만분의 일의 이유가 있다면
<목마름>이다.
오늘도 주님 앞에 목마른 가슴으로 눈물을 흘린다.
내인생의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을 유일하게 채울 분이 주님임을 알기에
나는 그분의 복음이 그렇게 가슴 벅찰 수가 없다.
오늘 처절한 예수님의 외침은
목마른 자에게 복음이요
목마르지 않는 자에게 심판이다.
내 눈에 눈물은 축복이요
내 가슴에 목마름은 영원한 생수로 인도하는 오솔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