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냄에 대한 확신(요7:25-36)
수 백 년 아니 수 천 년을 믿어온 하나님을 너희는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28)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 백 년 아니 수 천 년을 믿어온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직접 들어도 믿지를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수 백 년 아니 수 천 년을 믿어온 사람들이
그리고 눈 앞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도 듣지도 못하는 이유가?
수 많은 기적을 봤습니다.
그리스도가 와도 이 사람보다 더 많을까라고 해도 믿지를 못합니다.
신앙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역사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높은 교회의 건물에,
신앙은 수 많은 신도수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알고 누가 하나님을 믿을까요?
<보냄을 받은 자>만 알고
보냄을 받은 자만 믿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28)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29)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의 구분은
<보냄>입니다.
자기영광을 구하는 자는 스스로 말하고
보냄을 받은자는 보낸 자의 영광을 구합니다.
구분은 <보냄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누가 나를 여기에 보냈는가에 대한 확신입니다.
자기의 확신이나
자기의 감정이 아니라
현존의 정체성은 보냄에 대한 확신의 정도입니다.
왜 자기 만대로 살까요?
보낸 자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입니다.
보낸 자에 대한 의식이 없어서입니다.
보낸 자의 의식은 사명으로 이어지고
사명은 어떤 삶의 현장에서도 보냄에 대한 명확한 의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어떤 회유와 핍박과 고통에서 스스로를 버티게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힘이 아니라
보냄에 대한 확신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기전에 하나님께 물은 것은
보냄에 대한 확신입니다.
"누가 나를 보냈다 할까요? (출3:11)
모세가 하나님께 물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다라고 하십니다.
사명의 전제는 보냄에 대한 확신입니다.
함께함의 확신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지 않고
적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바른 자기 정체성으로 사는 시작은
이 보냄에 대한 확신으로 시작합니다.
보냄 받은 자는 보낸 자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보냈다고 알지 못하니 자기의 말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영광 자기의 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보내셨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보내셨고
하나님이 이 사람을 보내셨다는
하나님의 <보냄에 대한 확신>이 모든 일의 시작이요 확신의 근거가 되어야합니다.
보냄의 확신은 예수님의 사역의 근거이고
모든 불의와 싸우는 힘이 됩니다.
내 삶의 근거는 그래서 내가 아닙니다.
나의 감정,
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냄입니다.
그래서 견딜 수 있고,
그래서 이길 수 있고,
그래서 걸어갈 수 있습니다.
힘든 일
좁은 길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보냄의 확신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 확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음성을 듣고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 만난 사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영광은 들음이라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다 가졌지만
없었던것 한가지는
<보냄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나셨고
외적인 조건이 하나도 없었지만
오직 이 보냄에 대한 확신으로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증명합니다.
자신의 존재 근거,
사역의 근거,
삶의 근거를
오직<보냄>으로 삼습니다.
누가 십자가를 집니까?
누가 이 길을 걷습니까?
하나님께 보냄에 대한 확신을 얻은 자입니다.
이 확신 없이 걸을 수 없으며
이 확신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 믿어도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시매"
보냄은 우리 삶의 이유이자 모든 것을 견디는 이유입니다.
내가 이 교회를 선택했다 믿으니 교회를 옮기는 근거도 나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택했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났다 생각하니 사람을 버리고 포기합니다.
내가 좋아 이 일을 하니 일이 싫어지면 일을 던져버립니다.
다 나입니다.
아닙니다.
보냄을 받은 자라는 확신,
하나님이 믿게 하셨다는 보냄의 이유가 있는 사람만이
내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을 가게됩니다.
일이 아닙니다.
보냄입니다.
일은 보냄으로 결정됩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이 보냄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게 하고
말씀이 일하게 하는 근거를 삼습니다.
<보냄> 모든 일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