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과 같은 말은 들음이다(요7:10-24)
진짜는 배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배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우지 못한 예수가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어떻게 가르치느냐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배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참 지식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고 말한 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입니다.
우리는 자꾸 지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참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고 생명의 말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말씀의 특징은 하나님이 보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전한다는 것을 계속 반복합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만 전하게 됩니다.
생명은 생명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생명은 사람의 지식이나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근거는 세상이 아니라 하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세상사람과의 차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 하나님의 들은 말씀을 하는 차이입니다.
우리는 자꾸 내 말을 합니다.
성령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핑계 삼아 자꾸 자기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유는 쉽습니다.
자기의 영광입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18)
예수님이 가진 철저한 원칙이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보낸 자의 영광입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영광을 구하고
스스로의 이야기를 합니다.
듣지 않고 말하고
그곳에 보내지 않았는데 스스로 갑니다.
이유는 자기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영광이 사라지는 위기가 오면 여지없이 사람을 죽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19)
그것이 어둠의 속성입니다.
그리고 죽이는 핑계를 댑니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 )
죽이려 하였어도 귀신들렸다며 언제 죽이려 했느냐고 말합니다.
거짓말의 본심은 자신이 드러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의 실체는 자신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그 속에 거짓이 없고 불의가 없고 참됩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
불의의 시작,
거짓의 시작은 결국 자기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그 속에 거짓도 불의도 없다고 하십니다.
이유는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보내신 이의 영광>입니다.
영광의 갈등이 시작되면
오병이어로 배를 부르게 해도 미워하게 됩니다.
안식일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도 화를 냅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영광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사람도 죽이려합니다.
<영광의 싸움>입니다.
어둠의 마지막은 자기 영광이고
그 영광을 위해 거짓도 행하고
돈도 숨기고
원수끼리 친구가 됩니다.
예수님의 오늘 이야기의 결론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24)
우리가 속는 것이 외모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왔으니 글도 못 배우고 아는 것도 없다고 여깁니다.
오병이어로 배를 부르게 했으니 임금으로 삼아 자신들이 배를 채우는 자로 여기자고 합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쳤으니 죽일 놈이라고 합니다.
다 눈에 보이는
<외모>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영광이 모든 것의 목적이 되는 이유는 눈에 보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의 거의 대부분의 것은 눈이 보이는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기도도 그러하고
헌금도 그러하고
삶도 그러합니다.
그것을 경계하라하십니다.
기도의 골방을 이야기하고
눈을 들지 못하고 기도하는 세리가 그러하고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다 눈에 보이는
<외모복음>입니다.
<자기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용합니다.
자신들의 배부름을 위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한 것입니다.
참과 거짓의 다른 차이는
<자기 영광>이고
또 하나는
<희생>입니다.
영광의 반대 말은 뭘까요?
자기영광의 반대말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핵심은 용서이고 희생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희생>입니다.
이 희생은 내 것을 못하고 내 것을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의 의미는 드림입니다.
거꺼이 드리는 것입니다.
희생의 상징은 제사입니다.
제사의 의미는 기꺼이 내 대신 드리는 동물의 죽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끌려가는 양이 아니라
기꺼이 자유가운데 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즐거움입니다.
나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영광으로 인해 기뻐할 사람들의 즐거움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모습,
그 하나님의 영광이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절대 희생하지 못합니다.
자기 영광만 구하게 됩니다.
자기 즐거움,
자기 영광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나의 자유 안에서 희생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할 사람들이 먼저 보이지 않으면
그렇게 지는 희생은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다를바 없는 희생입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갑니다.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다고 하시면서 가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영광의 마지막인 죽음을 향한 달려가는 영혼들에 대한 눈물만 있을 뿐입니다.
자기 영광이 판을 치는 세상에
자기 영광이 아닌 보낸 자의 영광을 구하는 삶은
안으로 가볍고 쉬운 자발적 희생이지만
그 세상으로부터의
거짓과
미움과
시기와
핍박과
죽음으로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늘의 양식으로만 버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양식이 없다면 우리는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영광의 시작은
<자기의 말>입니다.
그래서 말은 그냥 말이 아닙니다.
영이고
생명이고
결국 자기 영광입니다.
말을 조심해야한다 정도가 아닙니다.
말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말의 본질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시작은 들음입니다.
들리지 않으면 외모가 보입니다.
진짜와 가짜의 가장 큰 특징은 희생입니다.
자유 안에서 누리는 희생입니다.
희생이어도 같은 희생이 아닙니다.
보고 가는 희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나의 희생으로 세워질 사람들을 보고 가는 것입니다.
들리지 않으면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자기 영광입니다.
보여야 가는 길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듣지 않고 일하려합니다.
그 본심은 나의 영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일하기 전에 들어야합니다.
생명은 오직 들음입니다.
듣지 않고 하는 모든 것은 자기영광입니다.
그래서 <영광>과 같은 말은
<들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