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마른 이유(요6:60-71)
따르던 제자들도 떠납니다.
함께하던 사람들도 떠납니다.
이유는 육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아서입니다.
육체의 배부름이 목적이 아니고 영적이고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좀더 육체적일때 관계가 좋고
사람들은 좀더 이성적인 목적을 가질때 좋도
사람들은 좀더 내 뜻에 가까울때 좋아합니다.
그래서 배가부를때 웃고
그래서 좋은게 좋아야 친하고
그래서 내 뜻대로 말없이 따라줄때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좀더 이성적인 목적을 가질때 좋도
사람들은 좀더 내 뜻에 가까울때 좋아합니다.
그래서 배가부를때 웃고
그래서 좋은게 좋아야 친하고
그래서 내 뜻대로 말없이 따라줄때 좋아합니다.
제자들이 떠난 이유는 영적이고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3)
먹고 배부른 기적을 보이면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그러자 영적인 이야기 생명과 하늘의 이야기를 하니 알아듣지도 못하고 수근거리다 떠나버립니다.
군중이 아닙니다.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열두명의 제자가 남습니다.
왜 이들이 남았을까요?
이들이 신앙이 좋았을까요?
이들이 학식이 높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잘 알아들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입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5)
육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시며 영에 관해 생명에 관해 이야기하자 다 떠나지만
육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시며 영에 관해 생명에 관해 이야기하자 다 떠나지만
오직 열둘이 남아 예수님곁을 지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눈치를 보고 할말을 못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서워하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 보낸 사람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육에 관해 생명에 관해 하늘에 떡에 관해 이여기할수 있고
다 떠나도 하나님이 주신 사람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참 많이 두려워합니다.
육체적인 배부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고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을 것으로 오해합니다.
아니 그것은 오해가 아니라 당연합니다.
그래서 늘 복만 말하고
늘 축복만 구해주고
어떻게 복받는지만 말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복으로 만든 육체적인 사람만 남습니다.
영과 생명을 말하면 떠날 사람만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에 관해 생명에 관해 말하지 못하니
그렇게 모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영에 관해 생명에 관해서만 말하고 증거할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육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합니다.
먹고 배부름이 목적이 아니라고합니다.
그래서 영을,
생명을 말할 믿음이 필요합니다.
모든 시작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육체와 배부름이 아닌
영과 생명을 말하면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떠날지 아셨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사람들을 남겨주시고 그들을 통해 다시 세상을 회복할것을 믿었습니다
제자들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를 사랑하셨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이 뜻을 따르셨습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배부름에 관한 복의 이야기를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영에 관해 생명에 관해 말해야합니다.
사람만 많이 모으면 된다는 논리,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은것처럼 인식하는 세상의 논리,
크고 많고 높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는 논리를 버려야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입니다.
배부름이 아니고
육체의 능력,
세상의 높음이 아니어도
사람들이 몰리게하는 어떤것이 아니어도
영과 생명으로만 승부를 걸때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과 길과 복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리게하는 어떤것이 아니어도
영과 생명으로만 승부를 걸때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과 길과 복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울때 이 원리를 가르치지 않고 이 원리로 대하지 않으면 배는 부릅니다.
그러나 영도 생명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자녀에게 육체적인 배부름만 있습니다.
그러나 배부름으로 키운 자녀와 사람은 결국 다 떠납니다.
먹고 마심으로 교제한 사람은 다 떠납니다.
블편해도
두려워도
외로워도
영으로 생명으로 대한 사람이 남습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래서 믿음이 남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믿음의 길을 따르때 하나님이 보내 주시는 사람과
하늘의 만나를 먹고 살겠다는 믿음입니다.
믿으면서도 아직 육체와 배부름이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원리라면 함께한 가롯유다입니다.
믿으면서도 세상의 배부름과 육체의 배부름을 버리지 못하는
믿으면서도 세상의 배부름과 육체의 배부름을 버리지 못하는
그래서 믿으면서도 영원히 목이마른 이유입니다.
그래서 갈등입니다.
그래서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눈물입니다.
세상의 법안에서 하나님의 믿음의 법으로 살아내는 것은 아픔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의 능력
말씀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말씀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세상을 살리는 것은 편한것이 아니라 평안이고
세상을 살리는 것은 배부름이 아니라 가난한 심령이며
세상을 살리는 것은 육체의 배부름이 아니라 영과 생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