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되려하지 말고 답을 보여주십시오(요6:1-15)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능력이 없어서 하는 행동을 아십니다.
어떻게 반응할지 보십니다.
... 오천명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라왔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먹일지 빌립에게 질문하십니다.
빌립은 정확한 계산을 합니다.
정확한 이야기로 예수님께 답을 말합니다.
이만한 사람이 먹으려면 이만큼의 돈이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할때는 답을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할 때는 이미 답을 알고 그 답을 이루고자 하시는 의지를 가지고 질문을 하십니다.
문제가 생겨서,
아픔이 생겨서,
힘듦이 생겨서,
필요가 생겨서 하나님이 질문을 하실 때는 답을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답을 묻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에 답으로 가려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선교에 관해서 질문을 하는 것은 선교의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일에 네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답을 가지고 가려합니다.
이 문제는 이래서 생겼고,
이 문제는 이렇게 해서 해결을 해야하고
이 사람은 이런것이 문제니까 이렇게 해야하고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질문하시는 문제는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답이 아니라 그 답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답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답은 우리가 줄수 없습니다.
우리의 착각은 답을 말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답을 말하면 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답을 말해서 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답이신 주님께 답을 이루시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해야할 일이있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지 못합니다.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사는 문제,
자녀 문제,
사업 문제,
삶의 모든 문제는 내가 해결하지 못합니다.
답을 자꾸 말하려고합니다.
삶의 문제에 답을 말하면 내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문제를 주신 것은 답을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일을 하십니다.
자신의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늘 자신의 일을 하면서 우리에게 질문을 합니다.
답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인생의 문제 앞에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자꾸 답을 찾으려하니까 힘이듭니다.
답은 없습니다.
설령 답을 내가 찾아 말한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답을 찾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답입니다.
인생을 먹이시고 영혼의 만나를 채우시는 것은
먹고 넉넉하게 만드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가 답이 되려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답이 될 수도 답을 말한다해도 내가 그 답을 이룰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답을 내가 이루려니 인생이 피곤합니다.
가정의 문제에 내가 답을 주려하니 힘이들고,
내 아내의 문제에
내 자식의 문제에 내가 답을 주려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내 사업,
내 직장 ,
내 삶의 현장의 문제에 내가 답을 주려하니 늘 곤고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구약에서 하늘에서 만나를 주시듯 인생의 참 떡을 주시고 양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주님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왕으로 임금으로 삼으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하십니다.
왕이시고 임금이신데 피하십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만 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는 왕의 자리,
사람들이 만든 임금의 자리는 피하십니다.
사람이 주는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주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 영원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예수님 자신의 답을 자신이 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을 향하여 답이시면서도
자신의 문제,
자신의 사역,
자신의 모든 것의 답을 오직 하나님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으로부터 왔다고 오해하는 자리는 피하십니다.
가장 어려운것은 내가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세상에 답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아담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십니다.
그 자리에 아예 가지를 않습니다.
내가 영광을 받을 자리는 아예 서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답입니다.
그저 우리가 할 일,
작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갔다 드리는 것만 하면 됩니다.
만약 물고기 오천개와 떡 오천개를 갔다 드렸다면 우리는 우리가 왕이 되려하고 우리가 답이라고 말할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물고기 두 개와 떡 다섯 개입니다.
그것이 내가 영광을 받지 않고
하나님이 답이라고 증명해 내는 일입니다.
큰 것으로 답이 되려하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주님이 답이 되게 하십시오.
주님은 이미 답을 가지고 질문하십니다.
내가 답이 되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향한 주님의 질문속에는 답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답이 없어 질문을 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이 되려하시기 위해 질문하십니다.
주님이 답이 되려면 겨우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야 주님이 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세상의 답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오직 성경은 예수님이 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증거가 없어도 자신은 세상의 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친히
하나님이 친히 자신이 세상의 답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답이 누구냐?
답이 무엇이냐?
우리는 자꾸 답을 말하려합니다.
아니 내가 답이 되려합니다.
아닙니다. 답은 주님이고 그 주님이 답인 것을 내가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그 증명은 오직 나의 작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큰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작은 것으로 증명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내가 답이 되려하고
주님은 세상에 나를 통해 주인임을 증명하려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인생의 질문을 던지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질문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네가 어떻게 이 일을 풀어가겠느냐?”
“네가 이 사람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겠느냐?”
우리는 자꾸 답을 가지고 가려합니다.
내가 자꾸 답이 되어 모든 문제를 풀려합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은 내가 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작은 것을 드리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이 되기도하고
그것이 작은 물질이 되기도하고
그것이 작은 섬김이 되기고하고
그것이 작은 눈물이 되기도합니다.
그 작은 것을 통해 주님이 답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 가져도 답이 되지 말고
주님이 답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그것이 인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