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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아들

친아들

 

 

 

 

 

친아들(요5:19-26)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18)

 

 

구약에서 수없이 이야기한 그림자가 실체로 오자 사람들을 그를 죽이려합니다.

그 그림자의 실체는 <친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친아들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죽이려합니다.

 

 

왜 갑자기 죽이려합니까?

세상은 하나님과 반대입니다.

세상은 무조건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내 이름 때문에 미워하고 내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 했습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자도 고치고

아픈자도 고치고

죄인들과 함께해도 세상은 그 친아들을 죽이려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것을 싫어합니다.

왜 세상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친아들을 싫어할까요?

 

 

하나님이 오면 세상은 자신의 심판을 알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면 세상은 자신의 멸망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느끼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해 보십시오.

세상은 당신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이상 미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친아들은 죽음을 당하는 것이고

그분의 친백성은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한다고 세상이 함께하고 칭찬하고 우리와 함께 할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친아들을 죽이려합니다.

세상은 친아들에게 속한 사람도 죽이려합니다.

어떤 방법을 도원해서도 죽이려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나라가 망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세상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친아들이 어떤 일을 한다 해도 싫은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친자식인줄 알았는데 DNA검사를 해보니 아이가 태어날 때 바뀐 것입니다.

친아들은 존재자체만으로 세상에 위협입니다.

친아들이 아닌 세상의 아들은 친아들이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고

설사 죽은 자를 살려도 싫은 겁니다. 그것은 내 세상을 빼앗긴다는 현실이 남았기에 그가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전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는 것을 보게하셨고,

하나님이 듣는 것을 듣게하셨고,

그보다 더 큰 일도 보게하셨습니다.

아들을 살리심 같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세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아들에게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모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세상을 향한 일입니다.

아버지를 봐야합니다.

아버지를 들어야합니다.

친아들만이 누리는 권세와 놀라운 생명을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세상과 다른 유일한 한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말이 압니다.

봐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봐야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어야합니다.

내 안에 생명의 능력이 있어야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친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말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주님은 하나님이 보게하고 듣게하신 것으로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의 것으로 우리를 증명하려합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증명하려합니다.

아닙니다.

나의 증명은 하나님이 보여주신것이고 하나님이 듣게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친아들입니다.

내것을 말하는 자는 내가 왕입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법입니다.

 

 

일하기 전에,

자신을 세상에 증명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을 봐야합니다.

하나님이 듣게 하시는 것을 들어야합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하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면 가슴이 터질듯 열정이 있고

들으면 내 안에 변하지 않는 확신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이 들음과 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보고 들음은 내려가야합니다.

요단 강으로 내려가야합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 내려가야 듣고 보게 됩니다.

 

 

일상의 자리가 아니라

일상을 내려놓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 서야합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자리에 서야 들립니다.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 서야 보입니다.

 

 

우리는 자꾸 <상향성>,

<높음을 향한 추구>를 구하기에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생각보다 <낮은 곳>에서 보여주시고

하나님은 내 생각보다 더 <초라한 곳>에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습니다.

친아들은 하나님과 함께 보는 것을 보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들어야 친아들이고

보아야 친 백성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들음>이고

우리의 존재는 <?>으로 증명됩니다.

 

 

 

 

*소성휘목사님께서 오셨습니다.

함께 사역하고 지낸던 목사님께서 등촌교회 청년들 선교방문차 천준혁선교사님 사역지에 왔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보고 함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나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페이스북이 아무리 좋아도 사랑의 실체를 보고 듣는 것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만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행복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