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와 얼마나의 차이(요5:1-18)
하나님의 치유하심의 조건은 우리의 아픔입니다.
38년된 오랜 병자를 보시고 먼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하느냐?'
이 병자의 문제는 죄입니다.
그 죄의 이름은
<변명>입니다.
이 병자는 병이 오랠수록 더 깊은 변명에 빠집니다.
특이하게 병을 고쳐주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병자의 병의 원인은 죄이고 그 죄의 다른 이름은 변명입니다.
이 병자의 모든 것이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병이 낫지 않는 이유는 베데스다 못으로
<사람들>이 나를 데려다 주지 않아서입니다.
내가 늦게 가는 이유는 <내>가 잘 움직이지 못해서입니다.
내가 나를 그렇게 만드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예수께서 네가 낫고자하느냐를 묻는데 그는 그가 고침 받지 못한 이유를 말합니다.
뼈속깊이 박힌 죄의 모습 <변명>입니다.
이 병은 이 사람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고침을 받지 않아야하는 안식일에 고침을 받은 것이 문제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예수님을 문제 삼습니다.
고침을 받는 변명도 대고 고침을 받지 말아야하는 변명도 됩니다.
죄는 진리냐 진리가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하는 이야기
내가 생각하는 뜻이 이루어 지지 않는 모든것에 다만
변명을 할 뿐입니다.
우리는 변명을 찾을때 주님이 찾으시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아프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병이 오랜줄을 아시고`
우리는 아프기 때문에 아픈 변명을 찾고
주님은 아프기 때문에 고쳐주십니다.
그것이 우리와 주님의 차이입니다.
고치느냐 못고치느냐의 차이입니다.
왜 아프느냐 왜 문제가 있느냐에 집중하지 말고
그 사람이 얼마나 아플까를 봐야합니다.
왜 안식일날 고쳤느냐를 보지 말고
그 사람이 안식일에도 고침을 받을만큼 많이 아픈 사람인것을 봐야합니다.
우리는 <이유>를 찾고
주님은 <자비>를 찾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사보다 상한 심령입니다.
이유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변명이 아니라 답을 위한 질문입니다.
오늘 내가 안되는 이유에 변명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아픈가 얼마나 도움이 필요한가로 우리를 찾으시는 주님이 감사할 뿐입니다.
사람을 대하고 일을 대하고 만남을 대할때
변명이 아니라 아픔에 집중하고
자비의 마음으로 대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는 변명입니다.
우리는 변명을 찾습니다.
거기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치료하십니다.
자꾸 이유를 찾지 맙시다.
아픔이 길어질수록 깊어진
이 <변명의 죄>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죄의 회복은 우리가 변명으로 나아갈때가 아니라 아픔에 대한 긍휼로 나아갈때 찾아옵니다.
<왜>라고 질문하지 말고
<얼마나> 라고 질문하십시요.
왜 그렇게 했냐?
왜 안됐냐? 가 아니라
얼마나 힘드냐?
얼마나 아프냐?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질문은 책임의 전가를 전제합니다.
<왜>는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얼마나>는 그 책임의 공감이며 함께짐입니다.
주님은 죄를 지러 오셨고
우리는 죄를 전가하려해서 그렇습니다.
함께 짐을 지는 곳에 치유가 있습니다.
왜가 아니라 얼마나라고 할때 답이 있습니다.
변명하는 사람에게 더이상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 예수님입니다.
변명을 받아주면 변명을 낫습니다.
그 변명에 얼마나로 대해야 끝이 납니다.
너 왜 일안하냐
너 왜 봉사 안하냐
너 왜 이거 안하냐라는 질문속에 더 깊어지는 병이 됩니다.
왜가 아니라 얼마나가 입에 붙어야합니다.
그것은 전가가 아니라 함께함으로 나아가는
예수님의 삶을 닮는 첫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