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요4:27-38)
사람의 존재 가치는 그 사람의 생각과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의 뜻과 그 일을 행하는 가치이다.
선지자의 일을 하면 선지자의 가치가 되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면 그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세상의 일을 하면 세상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 여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인과의 대화 중에 먹을 것을 구하러 보낸 제자들이 돌아와 여인과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다.
제자들을 먹을 것을 구하러 보내버리고
설령 대화 중에 돌아와도 그 대화를 방해하지 못한다.
아무도 묻지 못한다.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께서 여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케 하기 위하여
<일>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가져온 제자들이 먹을 것을 드리자
그렇게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
여자의 존재는 목마른 것을 채우기 위해 살았던 존재이다.
그래서 그 여인은 물을 통해 그 목마름을 채웠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목마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영혼에 대한,
사람에 대한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목마름을 채우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의 존재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
그분의 존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세상에서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는 여인과도 같은 존재다.
채워지지 않는 가슴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실제 존재를 잃어버려 채울 수 없는 영혼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존재는
오직 자신의 가치를 채우기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오심부터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삶의 이유와 존재 이유와 가치는
오직 <뜻> 과 <온전히> 사이에 거한다.
우리는 오직 <목마름> 과 <허전함> 사이에 있다.
둘 사이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내 가치를 채우기 위해 사는 존재는
오직 목마름이고 허전함 사이에서 늘 서성거린다.
이것이다 싶어 잡으면 그곳에는 목마름이고
목마름이 지나가면 허전함 속에 외로움을 달래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인생의 가치다.
그러나 오늘 먹을 것을 가져와도 먹지 않고
제자들을 향하여 나의 양식과 나의 존재가치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야한다.
보고프지 않으셨을까?
아니다.
목마르지 않으셨을까?
아니다.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은 목도 마르시고 보도 고프셔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면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는 말이 더 가치가 있다.
더욱 그분의 존재를 설명하는 말이다.
목마르고 배가 고파도 오늘 제자들에게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야하는지
우리의 존재가치가 무엇으로 결정되는지 설명하고 계신 대목이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나의 뜻과 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만이 인류 속에는 존재해왔다.
나의 뜻과 일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과
하나님의 뜻과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아담 이후 아브라함까지의 인류는 오직 자신의 뜻을 위해 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의 조상들은 오직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온다.
선지자가 누군가 ?
제사장이 누군가?
제자들이 누군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오늘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나의 뜻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둘째, 나의 존재는 무엇으로 결정이 되는가?
나의 존재는 내가 이룬 어떤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내가 속한 어떤 것으로 결정되고
내가 이룬 어떤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내가 추구하고
내가 목표로 하는 것으로 절대 결정되지 않는다.
오직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
나의 존재는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다른 말로 예수님이 하시는 기도이며
예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기도이다.
그렇게 사셨고 그렇게 기도하셨기에 그렇게 가르치셨다.
살지 않고 가르치지 않으시는 분이 예수님이다.
하늘의 뜻이 이루는 것이 우리의 존재를 설명한다.
우리는 자꾸 하늘의 뜻과 상관 없이 이룬 화려한 계급장으로
우리의 존재를 자꾸 설명하려 한다.
내가 무엇을 이루었고,
내가 어떤 일을 했고,
내가 어떤 위대한 일을 했으며
내가 어떤 사람을 알고
내가 위치의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존재로 알고 있다.
아니다.
그런 생각은 목마름과 허전함 사이를 오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오직 지금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도
그분이 원하시는 사마리아 여인을 붙들고 씨름하고
그 여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전하는 것으로 나의 존재가 설명된다.
사람들이 꺼리는 장소인 사마리아,
내가 갈려는 목적보다 돌아가야 하는 사마리아,
내가 만나는 사람보다 비천해 보이는 여자
사람들이 만나기 싫어하는 사마리아 여인,
남자들이 있기 싫어하는 우물가,
대화할 수 없는 길 공간이 있는 이방과 유대,
이런 사이를 넘어 오직 하나님의 뜻이 나의 존재를 설명함을 기억하고
그 사이를 오갈 때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를 하늘로 부터 인정받는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 즉 세상사람들과의 차이는
세상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으려 하고
예수님은 오직 하늘로부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고 인정받으려 하셨다.
오늘 이 일을 행하시고 한발 더 나아가신다.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사시듯
제자들을 향하여 그 존재 가치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라고 하신다.
세상의 목마름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오직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라고 하신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35)
추수 때가 이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밭은 추수할 때가 되었으니
그 일에 너희의 존재가치를 잡으라는 것이다.
너희가 노력하지 않고 심지 않은 것을 위해 너희를 보내고 참여케 하신다는 것이다.
그 일이 바로 하늘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한가지는
하늘의 뜻을 이루며 나의 존재 가치를 무엇으로 인정 받을까 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치를 세상으로부터 받으려면
하늘의 양식과 뜻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가치 있는 것이 와도
하늘의 뜻과 양식이 나의 가치가 될 때 우리는
잃어버린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사명은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사라졌다.
인간의 존재는 오직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존재로 목마른 존재로 변했다.
그 세상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다시 사명을 주신다.
존재를 확인시키고 존재의 목적대로 살기 원하신다.
그것이 다시 회복 된
<사명>이다.
하늘의 뜻은 인류의 잃어버린 사명의 회복이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구약의 수 많은 선지자와 조상들도
자신의 뜻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 사명의 삶을 살았다.
그 사명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 받았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모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지도자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그러나 기억할 것은 그들에게 하늘의 뜻이 임하지 않고
붙들지 않고 살 때는 그저 우상을 섬기는 아들이고
왕자나 살인자고
겨우 양을 치는 목동이다.
사명은 우리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사명은 우리를 세상의 목마름에서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로 인도하는 하늘의 양식이다.
그 양식에 예수님은 평생을 거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이 땅과 오는 세상을 심판하신다.
사명을 이룬 사람은 존재의 가치가 달라진다.
자신 만이 아니라 다시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35)
제자들에게 이 한 말씀 하기 위해
돌아와야 할 길을 사마리아까지 오시고
제자들을 보내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의 시간을 만드시고
여인에게 참 진리를 알게 하시고
목도 마르고
배도 심히 고픈 시간을 다 지나서
이 한 말씀을 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오늘 대화를 하신 것은 여인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향한 무언의 대화였음을
그리고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함 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이 곧 나의 양식이다"
나는 오늘 무엇으로 사는가?
<허전함>과 <목마름> 사이에 있지 않은가?
이유는 내 삶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이 없기 때문이다.
눈을 들어 희어져 추수할 밭이 보이는가?
뜻이 있는 자는 이 밭들이 보이고
없는 자는 밭이 아니라 자신의 세상만 보인다.
제자들을 향해 이 존재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수 없이 돌아오고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을 지라도
"나를 보내신 이의 뜻" 만이 그 모든 것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시는 예수님의 마음,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시는 그분의 뜻이 깨닫게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가진 것으로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예수님은 오직 하늘의 뜻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