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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좀 달라

물 좀 달라

 

 

 

 

 

 

 

 

 

 

 

 

달라(4:1-26)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려합니다.

일을 통해 이름을 내려합니다.

그래서 누가 세례를 많이 베푸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비교> 입니다.

 

비교가 해결되지 않는 인생은 결국 허무입니다.

비교가 해결되지 않는 수고는 목마름입니다.

 

 

<요한보다 세례를 많이 베푼 예수> 라는 이름이 붙을 예수님은 자리를 떠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비교가 아니라 본질을 따르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질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직

<요한보다 세례를 많이 베푼 예수> 머물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전보다 나은 ,

다른 사람보다 나은 ,

예수 믿고 나은 ,

예수 믿고 받은 ,

예수 믿고 잘되는 삶에 머물고 싶습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친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사람에 대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얻은 축복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 사람>입니다.

사람을 위해 갈릴리로 가지 않고 사마리아로 돌아가십니다.

사마리아로 가려하는 그분의 의지를 보여주십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

 

 

그분은 누가 세례를 많이 받았는지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진짜 핵심사역을 위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예수님을 노리는 바리새인들에게 쓸데없는 비교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오로지 그분의 사역의 본질을 위해 떠나셨습니다.

 

오직 <사람> 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여인,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

 

오늘 예수님과 대화하는 여인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비교> 사로잡힌 영혼입니다.

 

 

여인과 예수님의 모든 대화는 비교입니다.

 

먼저는 유대인과 사마리아를 비교하고

둘째는 여자와 남자를 비교하며

셋째는 내가 가진 (물동이와 우물) 당신이 가진 것을 비교하고

넷째는 야곱의 우물을 비교하고

다섯째는 야곱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여섯째는 남편을 비교하고

일곱째는 예배하는 이산과 예루살렘을 비교하고

여덟째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아닌 것을 비교합니다.

 

 

 

여인의 문제는 모든 것을 <비교>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사람의 생각이고 생각은 영입니다.

여인의 영은 오직 비교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남편이 여섯 째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섯번째인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과 대화와 생각과 영은 오로지 비교입니다.

 

 

그런 비교의 삶은 사람을 비참하게하고 허무하게하고 채우지 못하는 삶을 만듭니다. 그런 여인이 삶에 만족하고 기쁨을 누리며 살았을리 만무합니다.

 

 

그런 여인을 오늘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지 않고 바로가야할 길을 일부러 사마리아를 찾아 오셨고

우물가에서 여인을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말을 거십니다.

 

"물을 달라"

 

물입니다.

여인과 대화를 위해 일부러 물을 택했습니다.

우물가를 택했습니다.

 

물을 통해 목마름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물을 통해 생수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물을 통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설명하고

그리고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기가 막힌 웅덩이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이유는 우리에게 웅덩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단어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인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베드로에게 물고기입니다.

니고데모에게 광야에 들린 모세의 놋뱀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이고 반석입니다. 

엘리야에게 떡과 기름이고 과부의 아들입니다.

 

 

오늘 여인에게 동일하게

 

<>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시니"

"물을 달라"

"어찌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네게 달라하는 이가 누군인줄 알았더라면"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길을 그릇도 없고"

" 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 우물을"

"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여 그런 물을 내게도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 여기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이르되"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하니"

 

 

인생에 목이 마른 여인에게 물을 달라는 대화로 시작된 그녀의 진리를 찾는 과정입니다.

 

 

때로 질문은 어떤 인생에게는 걸리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런 질문의 속도는 45년이 걸렸고

모세에게는 40년이 걸렸으며

베드로에게는 3년이 걸렸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아니 죽을 때까지도 걸리는 질문이다.

 

 

오늘 여인에게 다시 오려는 보장이 없다.

아니 예수님이 찾아가야 하는 많은 <사람> 있기에

오늘 예수님은 짧은 시간 동안 질문들을 하기 위해

<> 이용하여 대화를 풀어내신다.

 

 

오늘 여인은 물을 통하여 진리를 만나게 된다.

 

 

사람마다 <> 해당되는 사건이나 일이나 대상이 있다.

그것이 자녀가 되기도 하고

그것이 실추된 명예나,

실패한 사업이나

실패한 자신의 아픔,

생각하기 싫은 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 허락하신 것은

우리를

<이는 그리스도이다>라는

고백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이다.

 

 

비교의 자리를 떠난 예수님의 선택은 스스로 목마름이었고

목마름은 <>이라는 단어를 던지기 위해 자신을 던졌던

여인을 향한 깊은 사랑과 배려이다.

 

 

우리는 우리 삶에 <>이라는  단어가 찾아오면 그리스도를 있어야 한다.

인생의 목마름,

인생의 물을 찾는 목마름에 해당하는 물을 기억해야 한다.

물속에 우리 인생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과 목마름이 숨어있다.

 

오직 속에 해결하시는 목마르지 않음을 채우기 위한 예수님의 발걸음이다.

목마름이다.

 

그분의 목마름은 오직 나를 향한 자기 계시이다.

 

 

사람이다.

그분의 목마른 발걸음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목마른 영혼들을 향한 마르지 않는 샘솟는 샘물이 되기 위해 찾으시는 예수님의 걸음은 사람이다.

 

 

우리 인생에 찾아오시는 주님,

그리고 물으시는 주님의 <> 해당하는 말씀이 들려야한다.

 

그래야 우리 인생에 답을 주시는 그분의 답을 찾을 있다.

 

 

이상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아픔의 이유,

반복적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 바로 주님이 나를 향하여 던지는

<물을 달라> 질문이다.

 

 

그것이 가족이다.

그것이 성공이다.

그것이 돈이다.

그것이 건강이다.

그것이 자녀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예수님의 던지신

<물을 달라> 질문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

예수님이 던지신

"물을 달라"라는 질문으로 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막연하게 기다려야 한다.

 

 

인생의 <> 찾으라.

그러면 속에서

 

<이는 그리스도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것이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