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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다른 이름은 눈물입니다

성령의 다른 이름은 눈물입니다

 

 

 

 

 

 

 

 

 

 

성령의 다른 이름은 눈물입니다(3:31-36)

 

 

 

 

 

 

알아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34)

 

 

 

 

예수님이라도 세례요한이 하늘의 일을 말씀하는 비밀은

 

오직 <성령>입니다.

 

 

땅에서 하늘을 여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탄생도 성령입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1:15]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1:67]

 

 

 

예수님의 탄생도 그러합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1:35]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도 그러합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도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3:21-22)

 

 

 

공생애를 시작할 때도 시험을 받으실 때도 그러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4:1]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4:14]

 

 

사역의 근본도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4:18]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내게 기름을 부으신것도

나를 보내 신것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하고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는 모든 원인이

 

바로

 

<성령> 이다.

 

 

성령의 목적은 결코

<> 아니다.

 

성령의 목적은

<기름부음이 아니다.

기름부음> 통해

가난한 ,

포로된 ,

눈먼 ,

눌린 자이다.

 

 

이스라엘 왕을 세우기 위해 기름을 붓는다.

그러나 기름 부음이 사람에게 목적이 아니다.

왕으로서의 삶이다.

삶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다.

 

솔로몬의 기름부음,

솔로몬의 일천번제의 목적이 자신이 었다면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드린 일천번제의 목적이 그의 백성이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왕상3:10)

 

 

 

우리는 자꾸 내가 채워지려고 성령을 구한다.

바보다.

어리석다.

 

성령의 영은

 

<채움의 >이다.

하나님의 <백성> 위한 채움의 영이다.

 

그래서 땅을 여는 하늘의 영이 성령이다.

땅에서 하늘의 삶을 사는 유일한 길은 성령이다.

 

땅에서 눌리고,

버림받고

외면당하고

포로되고

눈먼 자들이 하늘을 보고 하늘의 삶을 사는 유일한 길은 성령이다.

 

 

세례요한도,

솔로몬도,

예수님 조차도 성령의 기름부름이 있었다.

 

그러나 성령은 영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백성,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시는

 

<채움의 > 이시다.

 

 

 

세례요한이 정의 예수님은 성령을 받음이다.

성령을 받음의 목적은 백성이다.

 

질문을 하자.

 

성도가 목사(사역자, 선교사 등등) 위하나

목사가 성도를 위하나?

 

양이 목자를 위하나

목자가 양을 위하나?

 

 

목자의 직책은 성령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못한다.

말씀 하나를 전해도 하늘의 영감이 아니면 인간적인 복만 외치게 된다.

 

목자에게 성령이 주어지면

성령의 능력이 배가 되는 것은 언제일까?

 

솔로몬을 보면 간단하다.

 

<백성> 이다.

 

백성없는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 없는 세례요한은 아무것도 아니다.

 

백성이 염두에 없는 일천번제는 그냥 비린네 나는 쇼다.

 

요즘은 쇼가 많다.

 

백성은 염두에 없는

많은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성령의 간구가 너무 많다.

 

능력이 없나?

힘이 없나?

 

성령은 오직 <백성> 구하는 마음의 울타리 안에서만 움직인다.

 

백성을 위해 눈물이 없어진 세상이다.

말은 많아 침은 튀기는데

백성이 안에 울부짖어 듣는 소리에 흘리는 눈물이 마른 세상이다.

 

 

사역자에게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능력이 말랐다는 것이다.

리더에게 눈물이 없다는 것은 성령이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부흥이 아니라

우리 속에 백성으로 흘리는 눈물이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의 헌신이 아니라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백성을 향한 그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우리는 일천번제 후의 영광만 기억하고

일천번제 속에 숨은 솔로몬의 백성을 향한 눈물과

백성을 섬기기에 너무나 부족한자신의 처절한 현실을 알지 못한다.

 

 

성령의 가장 강력한 역사는

백성을 향한 가장 강력한 눈물에서 비롯된다.

 

 

자신을 채우기 위한 능력의 간구는 포기해야한다.

그래서 열심으로 자신의 어떤 것을 채우려는 욕심은 버려야한다.

 

욕심과 열정은 다르다.

욕심의 마지막은 자신의 자리이고

열정의 마지막은 백성과 함께이다.

 

 

우리는 욕심을 버리고 열정으로 살아야한다.

열정의 다른 이름은 눈물이다.

 

성령의 다른 이름은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다른 이름은 탄식이다.

백성을 향한 눈물의 탄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에 띄는 능력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백성을 향한 눈물이다.

 

 

성령은 <능력>이기 이전에 <함께하는 눈물>이다.

 

 

 

 

성령이 오시는 길은 간구가 아니라 함께하는 눈물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능력은 열심이 아니라 함께하는 눈물속에 있습니다.

 

 

 

 

*천국간 파니 전도사입니다.

가장 천한 곳에서,

물도 전기도 없는 곳에서

가장 가난하고 눌리고 없는 자들과 함께 했던 가장 능력 있는 자입니다.

어렵고 힘든 자들과 함께 하려 했던 그의 삶을 돌아보면

그가 가장 성령과 함께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시간이 지나보니 알게 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