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요3:22-36)
신랑인지 신랑의 친구 들러리인지 분명히 해야합니다.
흥할 사람인지 쇠할 사람인지 기억해야합니다.
증언하는 자인지 증언을 받는 자인지 구분해야합니다.
물로 세례를 베푸는지 불로 세례를 베푸는지 확인해야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지 그가 그리스도인지 명확히 알아야합니다.
땅에 속한 사람인지 하늘에 속한 사람인지 알아야합니다.
아들을 전하는 사람인지 내가 아들인지 구분해야합니다.
이것이 구분이 안되면 아무리 시작이 좋은 세례요한이어도 마지막은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명확하게 구분을 합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며
그가 신랑이고 나는 친구이고
그는 증언을 받는 자이고 나는 증언하는 자이고
그는 물뿐 아니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고 나는 오직 물로만 세례를 주고
그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이고 나는 땅에서 온 자이고
나는 아들이 아니고 오직 아들을 준비하는 사람인 것을!
이 구분이 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목적인지 주님이 잘 되는 것이 목적인지,
그분의 이름이 나는 것이 목적인지 나의 이름이 나는 것이 목적인지,
내가 주인공처럼 사는 것이 목적인지 그분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목적인지,
이 땅이 목적인지 저 하늘이 목적인지,
성령을 받아 사는 것이 목적인지 세상 것 받아 사는 것이 목적인지!
기도의 목적이 나인지 그분인지,
땀과 수고의 목적이 나의 이름인지 그분의 이름인지,
신앙의 목적이 나의 삶인지 그리스도의 삶을 증거하는 것인지,
삶의 목적이 나눔인지 움켜잡음인지,
섬김인지 섬김을 받음인지,
이 땅인지 저 하늘인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정말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있습니다. (36)
쉽습니다.
< 내 것 > 과
< 하나님의 것 > 만 구분하면 됩니다.
세례요한의 구분의 증명은
< 제자 > 입니다.
< 사람 > 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것과 자기의 것을 구분하고 있다는 증거는
그가 보내었던 제자들과
그에게 왔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신 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사이기도 하고
그것이 개성이기도 하며
그것이 남들이 하지 못하는 어떤 직업이기도 합니다.
그 일이 이 땅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함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증명이 되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열매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자와
그 마지막 열매도 그리스도께 보내는 자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것을 다 그리스도께 보내었습니다.
내 존재 가치의 증명을 다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돌립니다.
그렇게 마지막 나의 증명을 그리스도께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참 진리를 아는 사람이고,
참 자신을 아는 사람이며
참 예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나를 증명하는 마지막 열매를 끝까지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제자 이기도 하고
나의 사람들 이기도 하고
나의 재물이기도
나의 어떤 작업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끝까지 포기 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을 유유히 흘러 보낼 수 있는 사람이
< 나의 것 > 과
< 하나님의 것 >을 구분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구분하는 사람은
나의 마지막이 이 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자였던 세례요한은 자신의 마지막은 이 땅임을 압니다.
하늘의 것,
하나님의 것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자신의 존재의 증명인 제자와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낼 수 있었습니다.
구분을 한다고 다들 말은 합니다.
주를 위해 살겠다고 고백도 하고 결심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의 고백,
즉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제자'와 '사람'을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것이 질긴 세상의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내려 놓는 것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어야 합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선지자 노릇도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나님의 것과 나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의 이름을 이용하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다름이 없습니다.
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을 드리는 것으로 나의 목적을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목적인지 주님이 잘 되는 것이 목적인지,
그분의 이름이 나는 것이 목적인지 나의 이름이 나는 것이 목적인지,
내가 주인공처럼 사는 것이 목적인지 그분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목적인지,
이 땅이 목적인지 저 하늘이 목적인지,
성령을 받아 사는 것이 목적인지 세상 것 받아 사는 것이 목적인지!
내가 목적인 사람은 나의 가치를 높여주는 그 마지막 '제자'와 '사람'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세례요한의 존재 가치는 '제자'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보냄으로
그의 목적,
그의 가치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해 냅니다.
사람은 각자에 해당하는 '제자'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리이기도,
물질이기도,
명예이기도,
자녀이기도,
학업이나,
사역이기도합니다.
그러나 '제자'와 '사람'에 해당하는 어떤 것을
마지막에 내려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내 것> 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는 사람입니다.
이 구분이 되지 않고
투명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을 이용해서 나의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
열심히 사역합니다.
열심히 수고합니다.
그래서 많은 '제자'도 만들고 많은 '사람'도 모웁니다.
그리고 그 '제자'와 '사람'을 보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다음 이야기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의 여인이야기입니다.
그 핵심이 뭘까요?
목이 마르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마름입니다.
그 목마름을 사람들은 <내 것> 으로 채우려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생수를 마셔야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3-14)
한번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제자'와 '사람'을 붙잡지 않습니다.
그 하늘로부터의 생수를 맛보지 못하니 자꾸 세상에서
나의 존재 증명을 하려 목숨을 걸고 생명을 걸고 전부를 걸고 살아갑니다.
생수입니다.
생명수 입니다.
생명수 강가에 마르지 않는 생수를 먹어야 나의 존재의 증명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내 것으로 내 속을 채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열심도 수고도 땀도 흘려보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음은 목이 마름입니다.
평생 목이 마르며 살았습니다.
평생 타는 목마름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의 여인은 남편 여섯과 살았지만 목이 말랐습니다.
이 땅에 아무리 좋은 조건의 남편을 만나도
하늘의 것으로 채우지 않으면 목이 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생의 목적인 그리스도를 흥하게 하는데 자신의 전부,
자신의 삶의 전부인 '제자'와 '사람'을 포기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포기>로 증명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의 존재를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포기> 아니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선택>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확하게 증명합니다.
예수님의 예수님됨은 어디 있나요?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포기>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사단과의 시험에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수 없는 죽음의 마지막 관문에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인생의 목적을 알기에 잘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은 결정적인 죽음의 문턱에서 우리를 증명하도록 몰고 가지는 않으십니다.
평범한 삶의 일상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인생의 목적,
내 삶의 이유를 선택해 보라고하십니다.
'제자'가
'사람'이 목적인지
'그리스도'가 목적인지 선택해 보라고하십니다.
당신의 목적이 하늘이면 이 땅에서 당신의 존재를 증명해야합니다.
내가 그렇게 목숨 걸고 세운
그 '제자'와 '사람'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으로 증명해야합니다.
열매로 나무를 안다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열매는
<제자> 였고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매를 내가 쥐고 살면 나는 악한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주께 드릴 때 우리는
착한 나무
작은 일에 충성한 착한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작은 것 드리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내 존재를 증명하는 어떤 '제자'와 '사람'은 드리기 어렵습니다.
포기하고 하늘의 것,
하늘에 쌓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더 많이 받는 비결이라고 미리 일러주십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8:8]
지혜는 쉬운 것입니다.
<내 것> 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내 것이 내 것이 되면 내 것도 되지 못하지만
내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면 하나님의 것은 전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사신 하늘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기억해야합니다.
이 말씀을!
그러나 기억은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는
< 삶 >을 말합니다.
열매는 입술이 아니라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