쳐다봐야 하는데 올라가려합니다(요3:1-15)
물과 포도주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입니다.
물과 포도주를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성전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은 성전이 아니라 내 안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상은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아니라 빼앗을 수 없는 내 안에,
변하지 않는 내 안에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 나라는 물을 지나고
포도주를 지나고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들어가는지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합니다.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2장의 반복입니다.
물과 포도주
물과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물을 지났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스라엘도 홍해를,
요단강을 지났습니다.
물을 지나야합니다.
그리고 포도주,
예수님의 피를 지나 성령이 임해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조건을 자꾸 다른 것으로 채우려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좋은 하나님 나라라고,
내가 많이 배우면 좋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내가 세상적으로 잘 나가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오직 물과 성령입니다.
물은 죽음이고 성령은 생명입니다.
물은 육이고 성령은 영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물과 영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습니다.
그 답을 예수님은 오늘
< 믿음 > 이라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육체의 조건으로 거듭남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육체의 해방,
정치의 해방,
세상의 해방을 생각했습니다.
육체를 생각하면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봐도 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세상은 보이는 것의 추구함입니다.
그 세상에 예수님은 오직
<믿음>의 길을 제시합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
하나니 나라를 여는 유일한 길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유일한 길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자꾸 믿음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합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닙니다.
믿음의 반대는
<열심> 입니다.
세상적 열심이 믿음을 생기지 못하게 합니다.
열심히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 믿음의 법칙>입니다.
믿음의 법칙은 오직 내 발의 신을 벗는 순간부터입니다.
내가 신을 벗어야 물이 변하여 피가 됩니다.
뱀이 들립니다.
죽음이 넘어가고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가 내리고
메추라기가 내리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임합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다 내 발에 신을 벗어야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준비로 자꾸 내 발에 신을 신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준비는 신을 벗는 것이고
우리의 준비는 신을 신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거기서부터 잘못입니다.
니고데모는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줄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모태에 들어갈 만큼의 세상적 열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려 했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불고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우는 어떤 것,
내가 수고한 어떤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 같이 성령도 그렇게 눈에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조건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니라 열심으로 살려던 모세를 하나님은 죽도록 고생하게 했습니다.
아니 하나님 나라는 열심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신을 벗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광야로 먼저 가셨습니다.
광야로 갔다는 것은 내 신을 벗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를 지나야 신을 벗는데
인생의 도시 한가운데 사는 니고데모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합니다.
믿음입니다.
시간이 갔습니다.
그 믿음이 생기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니고데모의 변화입니다.
밤에 찾아왔던 그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전면에 나타나서 장례의 모든 절차에 필요한 것들을 헌신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던 니고데모가
이제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섬깁니다.
보장도 없는
이미 죽은 예수님의 시신과 십자가를 섬깁니다.
그것이 참 믿음입니다.
가장 초라한 니고데모가
가장 위대한 십자가를 섬기는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영생에 대한 고민이 행동이 되고
영생에 대한 말씀을 들음이 영생의 확신이 됩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의 첫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위치와 가진자의 삶을 추구하지만 니고데모는 다 가져도 허전한 가슴으로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우리는 다 가져보지 않으니까 다 가지면 뭐가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니고데모의 삶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나 다 가진 니고데모는 없는 것 한가지,
오직 믿음이 없었기에 인생의 방향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열심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참 인생의 의미를 만나게 됩니다.
열심은 세상의 것을 가지게 하지만
믿음은 영생,
영원한 것을 가지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오직 믿음 없는 세상에 믿음의 주로 오셨습니다.
세상의 것 다 있어도 세상이 끝이지만
믿음이 있으면 세상도 영생도 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있으면 온 천하 우주 만물이 내 것이 됩니다.
그 믿음이
물과 성령을 지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열심히 하려합니까?
실패입니다.
땀 흘려 수고하려고 결심하십니까?
세상의 방법입니다.
믿음은 오직 높이 달린 십자가를 쳐다 보는 것입니다.
쳐다볼 때 인생의 모든 아픔과 슬픔과 죄와 병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향해 내 놓으신 하나님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높이 달린 놋뱀을 향해
높이 달린 십자가를 향해 올라가려 열심을 내지 않으십니까?
열심히 올라 가십시오.
그리고 떨어지십시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에서 가장 열심의 대표입니다.
가장 높이 올라가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 사람이 열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더욱 못 들어갑니다.
열심을 내려놓고
오직 믿음으로 그 길을 가기 바랍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믿음이 우리의 삶을 가나안으로 인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