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와 일등(눅23:50-56)
눈을 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의식하는 눈을 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문제, 우리가 좀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믿음의 고백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참 믿음으로 서려면 이 눈,
사람들을 의식하는 눈을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이 남았습니다.
그 남은 일,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장사하는 일은 두 사람이 완성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시도록 장사하고 무덤에 안장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아무도 감히 예수님 곁에 오지 못할 때 그 두 사람은 예수님의 처형을 언도한 빌라도에게 가서 시체를 달라고, 장례를 치루겠다하고 준비한 몰약과 침향 섞은 많은 양으로 장례를 치룹니다.
오직 두 사람이 십자가의 사역을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두 사람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두 사람의 공통점은 죽음을 고민하고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영적인 세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죽음에 대해서 영생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아리마대 요셉도 그가 죽고 난 후를 준비하며 빈 무덤을 준비하였던 사람이다.
둘째, 둘 다 자신의 신분 때문에 숨어서 예수를 믿던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도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의원이요 관원이다.
요셉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은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믿는 자임을 드러내지 못하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고 몰래 예수를 믿었다.
공회에서 예수님의 결백을 주장하다 포기하고,
숨어서 믿던 사람들이다.
셋째, 공회의원 두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 준비한 것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장사합니다 .
두 사람이 드린 것은 장사비용 전체와 무덤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유대 관원이요 부자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준비된 것으로 장사하였습니다.
부자 요셉은 자신의 잘준비된 무덤을 예수님께 드렸고,
니고데모는 장사에 드는 것 일체를 드렸습니다. 몰약과 향유와…
믿음의 고백은 자신의 가진 것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진 것으로 예수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름이 있고, 높은 지위가 있고, 권력이 있던 두 사람입니다.
평소에는 늘 숨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드립니다.
아무도 없는 예수님의 곁을 죽고 나서 예수님을 지켜드립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기적의 가능성,
능력의 가능성,
나를 인정해줄 가능성이 있을 때 믿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살았을 때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뭔가 떨어질 떡이 있기 때문에 믿습니다.
자신에게 뭔가 자리가 확보되고 자신에게 뭔가 미래가 보장될 때 믿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죽고 난 후 믿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죽은 예수를 따른 것은 오직 이 두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씨앗을 이 두 사람이 마련합니다.
죽음을 안을 수 있는 믿음이 부활의 씨앗을 경험합니다.
넷째, 시작은 미비하나 마지막에 역전한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다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입니다.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따를때 조차도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 못하고 숨어서 밤에 예수를 따른 자입니다.
그런 약점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다 따를 때 따르지 못했고,
다 믿음을 고백할 때 믿음을 고백하지 못했고,
다 예수님 곁에 있을 때 예수님을 그저 바라봐야만 했던 약한 사람들입니다.
왜요?
자신이 잃을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없어서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가진 것이 없고 가지고 싶어 예수님께 갑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관원이고 부자고 존경도 명예도 다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이 살았을 때 그분께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약점이 되었습니다.
부끄러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자 그들은 자신의 약점을 넘어 예수님 곁에 갑니다. 그리고 아무도 꺼려하는 장사를 모든 비용을 드려 치룹니다.
다섯째, 사람들이 따를 때 숨었고, 숨을 때 따랐습니다.
다른 사람은 살았을 때 뭔가 얻기 위해서 가지만
그들은 살았을 때 부끄러움을 이기고 이제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참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예수님은 완전한 부활을 얻습니다.
없어서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가는 믿음과
지금 있는 그 많은 것을 다 잃어도 그럼에도 예수님 곁에 가는 믿음 중 어는 것이 귀합니까?
제자들 조차도 버리고 도망가는 상황에 그들이 드린 참 믿음으로 부활의 씨앗을 만드는 주인공이 됩니다.
귀한 믿음은 다 얻기 위해 따를 때가 아니라 잃어도 따르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너무 얻기 위해 따릅니다.
너무 가지기 위해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참 믿음은 얻지 못할 수 있어도,
되돌려 받지 못해도,
아니 나의 믿음의 고백으로 내 가진 것 다 잃을 수 있어도 드리는 고백이 참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다 도망을 가도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 곁에 섰습니다.
그것이 참 부활을 준비하는 믿음입니다.
잃을지라도 드리는 믿음!
니고데모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많은 실수를 드러냈고, 사람들이 죽이려 할 때 율법을 들어 예수님을 변호하다 실패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가 공회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다 거센 죽음의 물결에 넘어지고 자신의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기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마지막에 제자임을 부인했다면 이 두 사람은 늘 제자임을 숨기고 산 사람이다.
그런 약점이 있는 두 사람이 결국 마지막에 십자가의 부활을 준비하는 사람이 된다.
어떻게 이렇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넘을 때 가능합니다.
시선은 내가 잃을 것이 있다고 여겨질 때 가집니다.
사람들의 시선의 핵심은 내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함,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이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게 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을 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두려움입니다.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누가 당당합니까?
잃을 것이 없고 가지고 싶은 것이 없는 사람이 당당합니다.
왜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합니까?
잃을 것이 있을 수록 그러합니다.
니고데모의 이 사람들의 눈초리, 시선을 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예수님과의 대 화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누구보다 진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이 그 마음에 자리를 잡았고 하나님의 때에 그 말씀이 그를 힘 있께하고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니고데모가 부끄러워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다.
우리가 그렇게 익히 알고 잘 아는 이 진리의 말씀이 니고대모와의 대화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는 비록 이 말씀들을 듣고 믿음을 숨기고 살았지만 하나님의 정확한 타이밍에 그 말씀씨앗이 싹을 트고 죽음곁에서 죽음을 각오한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가 이 말씀을 믿음으로 믿고 결국 사람들의 눈초리와 사람들을 의식하던 눈을 넘어서 예수님을 마지막에 따르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말씀이 남았습니다.
우리를 세상의 눈을 넘어 사람들의 눈초리를 넘어
사람들의 시선을 넘어
예수님의 죽음을 장사할 수 있고
예수 믿는 것을 당당하게 하는 것은 오직 말씀입니다.
참 믿음은 죽음 앞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드린 이 두 사람의 믿음의 삶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로 보상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살았을 때 믿음으로는 꼴찌인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죽음을 각오한 믿음으로 꼴찌에서 일등이 됩니다.
꼴찌에서 일등을 만드는 것은 잃어버릴지라도 드리는 믿음의 삶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드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꼴찌에서 일등으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군대이야기입니다.
저 운동장 끝까지 달려갔다 오는 것 선착순을 했습니다. 열심히 달렸습니다. 일등도 있고 꼴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로 돌아가!'라고 대장이 명령합니다.
순간입니다.
일등은 꼴지가 되고 꼴지가 일등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일등이던 사람이 꼴지가 되고
세상에서 꼴등이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일등으로 서게 됩니다.
믿음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잃어도 드리는 삶의 고백입니다.
없는 사람이 더 가지려고 믿습니다.
그런데 다 가진 사람은 그것이 의미 없음을 알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다 포기 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아무 것도 없지만
가 가져도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아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영광도 들에 핀 백합화보다 못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등이 하나님 나라에서 꼴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세상에서 약함으로 살던 꼴찌가 믿음에 일등으로 살수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위대한 리더는 세상을 정복하는 리더가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리더입니다.
* 우리는 꼬마아이의 모래성을 쌓듯 열심히 세상에서 쌓습니다.
마치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이길 듯이 행복할 것을 믿고 쌓습니다.
그러나 결국 밀려오는 파도에 모레성은 다 사라집니다.
원래부터 있지도 않은 세상의 것 때문에 참 믿음의 고백이 필요할 때 믿음을 드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세상의 것은 모두 모래성입니다.
아이의 모래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