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장은 위에서부터 찢어졌다(눅23:44-49 )
예수님이 죽으시고 휘장이 찢어졌다.
그 길을 우리가 가게 되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는 절대 못 들어간다.
오직 성령이 우리를 이끄셔야 한다.
휘장이 밑에서 위로 가 아니라 위에서 밑으로 찢어졌다는 사실을 아는가?
성령이 먼저 오셔야한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고 그리고 우리를 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셔야한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먼저 오셨다.
예수님은 피로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거룩하게 된 우리를 성령께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휘장은 그의 육체다.
그분의 육체는
밑에서,
세상에서 찢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찢으셨다.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제물이 하나가 될 때 완전한 길이 열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이삭을 받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요구한 하나님은 두 가지를 준비하셨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이삭을 바치는 믿음이고
둘째는 나무(십자가)게 갇힌 수양이다.
하나님은 늘 표면적 사건을 통한 계시적 의미를 함께 보여주신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표인 이삭은 하나님이 살리신다.
원래부터 살리는 것이 목적이지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수양이다.
수양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다.
그 계획을 위해 아브라함이 믿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될 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다.
사람(이삭)을 살리기 위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필요하고 그 믿음은 결국 수양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수양이 죽어야 이삭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수양이 죽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세상을 살리기 위해(사람) 누군가의 믿음이 필요하고 죽일 수양이 필요하다.
오늘 예수님의 죽음은 둘 다를 동시에 이루신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믿음으로 자신을 드리고 그리고 자신이 죽는다.
자신의 믿음을 드리고 자신의 생명을 드린다.
그러나 살리는 것은 둘 다이다.
이삭도 살리고 아브라함도 살렸다.
하나님은 예수님도 살리고 세상도 살리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의 일은 믿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시기에 둘 다를 동시에 이루신다.
하나님의 연합사역이다.
철저한 연합이다.
구약의 그림자와 실체의 이루어짐이 십자가로 완성되었다.
첫째, 흑암이다.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되었다.
흑암이다.
9번째 재앙 흑암이다.
구약의 유월절사건 즉 장자가 다 죽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에만 죽음을 면하는 사건 전에 일어난 재앙은 흑암이다.
삼 일 동안 일어났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죽으시는 날에는 3시간 동안 일어났다.
둘째, 휘장이 찢어진 것이다.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들어가서 모든 죄를 사함 받던 그 사건이 이제 완전히 단번에 드려지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이 없어진 것이다.
사람이 들어가기 위해서 제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오시기 위해서 휘장을 찢으셨다.
성령이 오시기 위해 휘장을 찢으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갈 수 없다.
그래서 성령께서 직접 찾아오신다.
그것이 오순절 성령이다.
예수님께서 휘장을 찢으셨으나 우리는 둔하여 하나님 앞으로 가지 못한다.
그래서 그 길을 직접 성령이 오셨고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여 가신다.
휘장은 우리가 가기 위해서지만 먼저 그 길로 성령이 오셔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이끄셔야 한다.
휘장은 위에서 찢어졌다.
성령은 위에서부터 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적 사역이다.
셋째, 어린양의 죽음이다.
에덴동산의 아담의 가죽옷부터 구약의 모든 어린양은 예수님을 말한다.
그 어린양이 이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친히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
영원을 위한 마지막 제사가 되었다.
이삭의 수양부터 모든 어린양의 이야기가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분이 피를 흘림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 전에 피로 거룩함을 입어야 하기에 그분의 죽음, 피가 필요한 것이다.
넷째, 사람들이다.
멀리서 있었다(49)
그를 가까이서 보지 못하고 멀리서 있었다.
욥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시험을 보며 모든 사람이 외인이 되었다.
욥의 삶 속에 그리스도가 숨어있다.
그가 의인으로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시험 당하고 외면 당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을 미리 이야기한다.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표현한다.
오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이 완성되고 그림자의 실체가 이루어졌다.
사람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구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감격이다.
그래서 눈물이다.
그래서 은혜이다.
왜 믿게 되었는지
왜 알게 되었는지
왜 불러주시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선택 받은 자들만 아는 이 감격!
구약의 수 많은 이야기와
수 많은 예언과
수 많은 상징들과 이야기가
십자가를 통해 나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휘장이 위에서부터 찢어졌다.
그분이 나에게 오시기 위해서이다.
그분이 나에게 찾아 오시기 위해서 그 수 많은 역사를 돌고 돌아 찾아오셨다.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솔로몬,
수 많은 인물을 통해 사건을 통해 역사를 통해 이루고 싶은 하나님의 일이
나를 찾아오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를 통해 그분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해서이다.
성소 휘장이 찢어져야 그분이 오신다.
그리고 내가 그분과 함께 갈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 길로 오셨고
내가 성령과 함께 담대히 그 길로 간다.
그래서 손으로 지은 성전으로 통해 그분을 만나지 않고
내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이 오셔서 나를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오직 하나님 만이 그 휘장을 찢을 수 있고
그분 만이 우리를 다시 그 길로 가게 하신다.
내가 믿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그 순간 우리는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된다.
내가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여기면 우리는 또 이스라엘이 된다.
성소가 찢어지고 돌아가셨다.
그분이 이루고자 한 것은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이루고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우리의 일은 그 길로 영혼을 이끄는 것이다.
소개하는 것이다.
알게 하는 것이다.
믿고 안 믿고는 성령의 일이다.
예수님은 그 길로 성령이 오시고 성령께서 사람을 이끄시도록 길을 여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길과 상관없는 수 없는 일들을 한다.
그 길로 사람을 인도하지 않고
세상에서 수 없는 헛 짓을 한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과 상관없는 짓을 한다.
수 천 년을 준비하고 죽음으로 이루신 그 일과 상관없는
이 땅에서의 영광을 얼마나 구하고 구하는가?
그 길로 가지 않는 어떤 인생도 의미가 없고
그 길로 향하지 않는 어떤 일도 하나님과 대적하는 일이 된다.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먼저 그의 나라와 의라 했다.
그 길로,
찢어진 휘장을 지나 영원한 성소로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이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사는가?
돈 벌이가?
공부가?
직장이?
집이?
그 길로 인도하는 일이 되는가?
선교한다고 집이나 지어주고
선교한다고 먹을 것이 나 주고
선교한다고 학교나 지어주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나라와 의의 전부인가?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반성하고 스스로 질문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무엇인가?
사역과
삶과
수고와
열심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휘장이다.
성소이다.
어떤 사진에서 보았다.
"그리스도가 없는 가슴마다 선교지이고
그리스도가 있는 가슴마다 선교사이다"
라고 했다.
휘장을 지나야한다.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을 잡고 가야한다.
들로 산울가로 가서 내 집을 채우라하신 그분의 음성이
오늘은 그렇게 절절하게 들릴 수가 없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빈 성소 휘장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