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반대말은 나입니다(눅23:32-43)
세상이 생각하는 구원자는 자신을 먼저 구원하는 것입니다.
관리들도 자신을 구원하라 합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눅23:35)
군인들도 너를 먼저 구원하라 합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눅23:36- 37)
함께 달린 행악자 중 하나도 너를 먼저 구원하라합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23:39)
세상에서 소리도 치지 못하는 사람은 백성입니다.
할말이 있어도, 뭐라 하고 싶어도 말못하는 사람은 백성입니다. 옳든지 그르든지 말도 못합니다. 그것이 백성이지요.
그런데 말만 못한다 뿐이지 같은 소리입니다.
관원과,
군인과
행악자와 같은 소리입니다.
무슨 소리일까요?
너를 먼저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구원자,
세상의 그리스도,
세상의 영웅은
자신이 먼저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높아지는 것이고,
자신이 먼저 유명해지고 능력을 보이고
사람들에게 유능함을 자신에게 먼저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법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방법입니다.
자신이 먼저 잘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자신이 먼저 높아지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구하지 못한 자가 어찌 구원자가 되며 그리스도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법입니다. 세상의 눈입니다.
그래서 실력이 없으면,
그래서 돈이 없으면,
그래서 학위가 없으면,
그래서 큰 사업, 큰 목회, 잘나가는 직장이 아니면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 세상의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의 세가지 시험은 그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돌로 떡을 만들어 자신이 먼저 능력을 보여주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천사가 붙들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영광을 가지고 있어야 적어도 세상의 메시야가 되는 것이 세상의 법입니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번도 기적을 베푸신 일이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번도 능력을 베푸신 적이 없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아담이 살았던 삶의 반대를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은 자신입니다. 오직 자신이 먼저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아내도 버리고,
자신을 위해서 에덴동산도 버리고,
자신을 위해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도 버리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던 삶,
그것이 죄입니다.
죄의 근본인 < 자신 > 을
포기하신 삶이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의 시작은
< 자신을 포기함 >입니다.
오늘 세상 권세의 상징인 관원들,
세상 힘의 상징인 군인들,
세상의 악한 자들의 상징인 행악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자신'을 먼저 구원하라고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을 먼저 구원하면 절대 구원자가 되지 못합니다.
자신을 먼저 구원하고
자신을 위해 돌을 떡이 되게 하고
자신을 위해 천사를 이용하고
자신을 위해 영광을 얻으면 그는 또 다른 아담이됩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었을까요?
이 땅에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신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사는
참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세상과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살수 있음을 증명해 내고 싶은 것입니다.
아담의 원래 삶을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아담의 죄,
< 자신 >에서
예수님의 의,
< 자기포기 > 를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이 자기포기를 통해 이룬 '의'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자기 포기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시험은
< 나 > 입니다.
자신의 구원입니다.
모세의 마지막 시험은
'나' 였습니다.
그런데 '나'에서 모세는 넘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평생의 시험은
< 나 >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부인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은 곧 자신의 의를 부인하고
자신의 길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 자기부인의 삶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의 의를 말하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의를 내세우고 싶어합니다.
조금만 잘하면 자랑하고 싶어하고
조금만 잘하면 높아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바벨탑입니다.
조그만 마음이 맞으면 서로 높아져서 세상에서 높은을 내고 싶어합니다.
조그만 마음이 맞으면 서로 합쳐서 더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더 가지려고합니다.
다 '나' 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나입니다.
나를 먼저 구원하라합니다.
내가 잘되야 뭐라 할말이 있는데 네가 잘되라고 합니다.
네가 먼저 높아지라 합니다.
네가 먼저 가지라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의 시작인데
지금도 변함없이 사단은 그렇게 유혹합니다.
'너를 먼저 구원하라'
'너를 먼저 높이라'
'네가 먼저 가지라'
'네 가족이 중요하다'
'네 명예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눅18:29]
시대가 발전하고
세상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무엇이 발달합니까?
'나'입니다.
나에 대한 개념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내가 더 중요하고
내가 더 존귀하고
내가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하지 않는 나는 이미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넘어짐의 마지막은 < 나 > 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수없이 세상은 소리칩니다.
내 안에서 < 나 > 라는 소리가 수없이 아우성을 칩니다.
내가 잘 되야 할 말이 있다
내가 잘 되야 뭐라도 사람들이 듣는다.
내가 잘 되야 영향력이 있다.
우리는 나의 능력만큼 올라왔습니다.
우리는 나의 힘 만큼 자랐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한 나만큼 살았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하나님의 부활이 없고,
그래서 내 안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래서 내 안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지 못합니다.
눈을 뜨면 세상이 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인데
'나'로 살아오니
내 힘으로 살아온 나의 공로밖에 없습니다.
내 능력으로 살아온 한 평 남짓 땅밖에 없습니다.
내 지식으로 살아오니 겨우 밥만 먹고 살아왔습니다.
< 나 > 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못박아야
하나님이 일합니다.
< 나 > 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장사지내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 나 > 를 예수님과 함께 주고 함께 살아야
영원한 누림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냈는데,
그래서 성령의 전이 내 안이 되었는데,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왜 성령이 우리의 마음인지,
왜 성령이 우리와 연합되었는지!
< 나 > 입니다.
나를 제어하는 유일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성령을 따라야 내가 없어집니다.
성령을 따라야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할수 없으되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성령입니다.
나의 반대말은 남이 아닙니다.
나의 반대 말은 성령입니다.
나의 반대는 성령입니다.
육체의 소욕의 반대는 성령의 소욕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예수님의 자기 부인의 핵심은 성령입니다.
철저한 연합으로 인한 자기부인입니다.
세상은 '나'가 중요하다 합니다.
그 세상에서 '나'가 아닌 삶은
성령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유는 어떤 사람도 '나'를 이기는 힘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 십자가 > 의 반대말은
< 나 >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