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와 엘리야(눅22:54-62)
사람을 두려워함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겨울 말 몇 마디에 무너지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두려워한 것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눈입니다.
사람들의 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두려움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내 인생을 실패할 것 같은,
내 삶이 끝이 날것 같은 두려움,
내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사람들이 무서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도 서기관도 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것은 나 입니다.
나의 실패입니다.
나의 죽음입니다.
여종이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 말에 베드로는 부인하고 부인하고 부인합니다.
우리가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서운 것은 내 인생의 실패입니다.
사람들의 말이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그 말 때문에 실패할 것처럼 보이는 내 인생이 두려운 것입니다.
여종의 말이 아닙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주와 함께 죽겠다고 했습니다.
주를 위해 내 목숨도 던지겠다 했습니다.
베드로는 알았지요.
주를 따르는 것은 목숨이 위험할 수도,
주를 따르는 것은 생명이 위험할 수도
그래서 내 인생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때는 사람들의 말이,
사람들의 눈이 없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은혜의 본질인 그리스도가 함께 있었고
날마다 기적이 있고
날마다 먹을 것이 나오고
날마다 뭔가 될 것같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고
사람들이 쳐다 볼 때는
다시 실패하고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내 인생을 마지막까지 맡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내 인생을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신다는 믿음입니다.
영생입니다.
믿음의 끝은 영생입니다.
죽음에 대한 확신이 오지 않으면 믿음의 끝이 아닙니다.
엘리야지요.
엘리야의 훈련은
엘리야의 마지막 훈련은 영생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모두 하나님이 지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도 자신의 기도로 경험합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기적을 베풉니다.
잘 나갔습니다.
보란듯이 기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심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풀지 못한 한가지는 자신의 생명입니다.
이세벨의 협박한마디에
그는 죽음의 두려움,
인생의 실패,
인생의 끝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겨우 종을 통해 전해들은 한마디에 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그것입니다.
그가 믿음이 있었지만 진정한 인생의 마지막,
죽음에 대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부인의 본질은 죽음입니다.
끝날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워갑니다.
믿음의 끝은 죽음을 넘어선 영생입니다.
엘리야를 통해 보여주는 성경의 진리는 영생입니다.
베드로가 주와 함께 있었으나 그가 그리스도로부터 넘어야 하는 영생에 대한
인생의 최종 승리에 대한 믿음의 끝을 가지지 않았기에 그는 오늘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이세벨이 그 두려움,
죽음의 한계를 종을 통해 전해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망을 갑니다.
베드로에게 여종이 그것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도망을 갑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났던 산으로 가고
베드로는 갈릴리 예수님과 함께 했던 고향으로 갑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떡과 물로 회복을 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고기와 떡으로 회복을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
인생의 끝,
믿음의 끝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세상의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사랑은 언제 하게 됩니까?
두려움을 이길 때 하게 됩니다.
사랑은 절대 두려움,
실패에 대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 하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가 죽음에 대한 믿음을 넘고 난후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를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요21:19)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누가 주를 따라갑니까?
인생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넘은 사람입니다.
누가 주를 사랑합니까?
죽음에 대한 끝을 넘어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영생입니다.
영생에 대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주를 따릅니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들의 작은 말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나 작은 바람에도 넘어집니다.
그것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아도
작은 여종의 말,
전혀 영향력 없는 여종의 말이어도 우리는 자빠집니다.
주를 따르고 좇았지만 주가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죽음을 넘는 영생입니다.
영생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주는 일을,
사명을 주지 않습니다.
겨우 일 좀 했다고
겨우 학위를 가졌다고
겨우 선교지에서 경력을 쌓았다고
겨우 세상에서 조금 성공하고 돈을 모았다고
하나님은 사명을 주지 않습니다.
사명은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사명은 내 전부를 거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진정한 사명은 이 믿음,
영생에 대한 믿음을 알고 난 후입니다.
베드로의 진정한 사명은 이 믿음,
죽음을 이기는 믿음,
영생을 소유한 믿음을 가지고 난 후에 찾아옵니다.
생명을 걸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생명을 잃어도 두렵지 않은 사람을 훈련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한 훈련은 바로 이 훈련입니다.
믿음의 끝인 영생입니다.
죽음도 이기는 믿음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믿음은 바다에 빠지는 믿음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며 내 인생의 실패를 두려워하는 믿음은
여종의 말에 내 인생이 쓰러지는 믿음입니다.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떤 갈멜산의 기적도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도
3년 가뭄 속에서도 마시고
3년 비가 없는 곳에서도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도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영생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것은
인생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칼도
권력도
실패도 어떤 핍박도 굴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부인은 곧 영생에 대한 부인입니다.
여종 앞에서 두려워한 나의 실체는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고
결국 영생에 대한 믿지 못함이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상징입니다.
베드로는 상징입니다.
영생을 모르던 이전의 삶과
죽음을 넘은 참 믿음을 통한 영생의 삶!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고
어떤 수 많은 기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넘어야 할 믿음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영생입니다.
영생 얻을 믿음이 없으면
세상의 작은 것도 다 두려움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에게
이 믿음을 주시고
그리고 사명을 주시고
그리고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 보여주십니다.
죽음까지도 영광스러운 삶!
그것이 영생을 가진 사람의 마지막입니다.
엘리야의 마지막은 상징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만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여정입니다.
가나안의 삶과 죽음과 영생의 긴 여정의 대표들이 지금 마지막으로 만나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남은자 베드로가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두려움 앞에서 오늘 부인합니다.
주를 믿는 것에 우리가
베드로처럼 믿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지막을 가야합니다.
오직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구하였다' 그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믿음은 그냥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
세상의 영이 수없이 두려움의 여종들을 보내어 우리를 미혹할 때
그 삶의 현장에서 영생을 믿는 믿음으로 증명해 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어야 물위를 걷습니다.
믿어야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믿어야 감옥 문이 열리고
믿어야 하나님의 기적이 보입니다.
그 믿음을 넘지 못할 때는 주님만 기적을 베푸시지만
그 믿음을 넘고 나니 가는 곳마다 기적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이제 만나고 싶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함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겨울 말 몇 마디에 무너지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두려워한 것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눈입니다.
사람들의 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두려움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내 인생을 실패할 것 같은,
내 삶이 끝이 날것 같은 두려움,
내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사람들이 무서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도 서기관도 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것은 나 입니다.
나의 실패입니다.
나의 죽음입니다.
여종이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 말에 베드로는 부인하고 부인하고 부인합니다.
우리가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서운 것은 내 인생의 실패입니다.
사람들의 말이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그 말 때문에 실패할 것처럼 보이는 내 인생이 두려운 것입니다.
여종의 말이 아닙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주와 함께 죽겠다고 했습니다.
주를 위해 내 목숨도 던지겠다 했습니다.
베드로는 알았지요.
주를 따르는 것은 목숨이 위험할 수도,
주를 따르는 것은 생명이 위험할 수도
그래서 내 인생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때는 사람들의 말이,
사람들의 눈이 없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은혜의 본질인 그리스도가 함께 있었고
날마다 기적이 있고
날마다 먹을 것이 나오고
날마다 뭔가 될 것같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고
사람들이 쳐다 볼 때는
다시 실패하고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내 인생을 마지막까지 맡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내 인생을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신다는 믿음입니다.
영생입니다.
믿음의 끝은 영생입니다.
죽음에 대한 확신이 오지 않으면 믿음의 끝이 아닙니다.
엘리야지요.
엘리야의 훈련은
엘리야의 마지막 훈련은 영생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모두 하나님이 지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도 자신의 기도로 경험합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기적을 베풉니다.
잘 나갔습니다.
보란듯이 기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심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풀지 못한 한가지는 자신의 생명입니다.
이세벨의 협박한마디에
그는 죽음의 두려움,
인생의 실패,
인생의 끝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겨우 종을 통해 전해들은 한마디에 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그것입니다.
그가 믿음이 있었지만 진정한 인생의 마지막,
죽음에 대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부인의 본질은 죽음입니다.
끝날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워갑니다.
믿음의 끝은 죽음을 넘어선 영생입니다.
엘리야를 통해 보여주는 성경의 진리는 영생입니다.
베드로가 주와 함께 있었으나 그가 그리스도로부터 넘어야 하는 영생에 대한
인생의 최종 승리에 대한 믿음의 끝을 가지지 않았기에 그는 오늘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이세벨이 그 두려움,
죽음의 한계를 종을 통해 전해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망을 갑니다.
베드로에게 여종이 그것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도망을 갑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났던 산으로 가고
베드로는 갈릴리 예수님과 함께 했던 고향으로 갑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떡과 물로 회복을 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고기와 떡으로 회복을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
인생의 끝,
믿음의 끝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세상의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사랑은 언제 하게 됩니까?
두려움을 이길 때 하게 됩니다.
사랑은 절대 두려움,
실패에 대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 하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가 죽음에 대한 믿음을 넘고 난후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를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요21:19)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누가 주를 따라갑니까?
인생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넘은 사람입니다.
누가 주를 사랑합니까?
죽음에 대한 끝을 넘어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영생입니다.
영생에 대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주를 따릅니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들의 작은 말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나 작은 바람에도 넘어집니다.
그것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아도
작은 여종의 말,
전혀 영향력 없는 여종의 말이어도 우리는 자빠집니다.
주를 따르고 좇았지만 주가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죽음을 넘는 영생입니다.
영생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주는 일을,
사명을 주지 않습니다.
겨우 일 좀 했다고
겨우 학위를 가졌다고
겨우 선교지에서 경력을 쌓았다고
겨우 세상에서 조금 성공하고 돈을 모았다고
하나님은 사명을 주지 않습니다.
사명은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사명은 내 전부를 거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진정한 사명은 이 믿음,
영생에 대한 믿음을 알고 난 후입니다.
베드로의 진정한 사명은 이 믿음,
죽음을 이기는 믿음,
영생을 소유한 믿음을 가지고 난 후에 찾아옵니다.
생명을 걸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생명을 잃어도 두렵지 않은 사람을 훈련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한 훈련은 바로 이 훈련입니다.
믿음의 끝인 영생입니다.
죽음도 이기는 믿음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믿음은 바다에 빠지는 믿음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며 내 인생의 실패를 두려워하는 믿음은
여종의 말에 내 인생이 쓰러지는 믿음입니다.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떤 갈멜산의 기적도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도
3년 가뭄 속에서도 마시고
3년 비가 없는 곳에서도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도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영생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것은
인생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칼도
권력도
실패도 어떤 핍박도 굴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부인은 곧 영생에 대한 부인입니다.
여종 앞에서 두려워한 나의 실체는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고
결국 영생에 대한 믿지 못함이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상징입니다.
베드로는 상징입니다.
영생을 모르던 이전의 삶과
죽음을 넘은 참 믿음을 통한 영생의 삶!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고
어떤 수 많은 기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넘어야 할 믿음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영생입니다.
영생 얻을 믿음이 없으면
세상의 작은 것도 다 두려움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에게
이 믿음을 주시고
그리고 사명을 주시고
그리고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 보여주십니다.
죽음까지도 영광스러운 삶!
그것이 영생을 가진 사람의 마지막입니다.
엘리야의 마지막은 상징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만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여정입니다.
가나안의 삶과 죽음과 영생의 긴 여정의 대표들이 지금 마지막으로 만나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남은자 베드로가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두려움 앞에서 오늘 부인합니다.
주를 믿는 것에 우리가
베드로처럼 믿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지막을 가야합니다.
오직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구하였다' 그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믿음은 그냥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
세상의 영이 수없이 두려움의 여종들을 보내어 우리를 미혹할 때
그 삶의 현장에서 영생을 믿는 믿음으로 증명해 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어야 물위를 걷습니다.
믿어야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믿어야 감옥 문이 열리고
믿어야 하나님의 기적이 보입니다.
그 믿음을 넘지 못할 때는 주님만 기적을 베푸시지만
그 믿음을 넘고 나니 가는 곳마다 기적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이제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