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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에 사람은?

당신 옆에 사람은?

 

 

 

 

 

 

 

당신 옆에 사람은? (22:35-38)

 

 

 

칼을 들라 하십니다.

평화를 위해 오신 분이 칼을 들라 하십니다.

칼을 들라 하신 분이 칼을 들고 귀를 잘랐더니 귀를 고쳐주십니다.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 하신 분이 자루가 이미 있다 하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십니다.

 

 

 

오늘은 갑자기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칼을 들라는 이야기로 하십니다.

'너희' 관한 이야기를 하시다 이제는 너희를 위해 전도도 가지고 배낭도 신발도 가지라 하십니다.

과거에 내가 너희를 보낼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하셨지만 이제는 가지라 하십니다.

 

이유는 뭘까요?

이제는 가지라 하실까요? 그것도 칼까지…

 

 

 

이유는 하나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22:37 )(53:12)

 

 

 

 

칼을 사용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칼을 들어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일 자들에게 위협을 당하는 순간 제자들을 위해 배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전후 자신들의 최소한의 방어를 위한 법입니다.

최소한의 방어. 사람 12 자루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중동은 칼을 들고 다녔습니다.

한번도 칼을 들고 사역하신 적이 없는 예수님은 제자들

'너희' 위한 최소한의 방어책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칼은 예수님을 죽일 자들에게 불법자들의 동류로 빌미를 주기 위함입니다.

 

 

쓰지 않는 칼과 가지라는 명령은 가지의 의미입니다.

 

 

 

첫째, '너희' 제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책입니다.

 

각각 사람에게 주어진 칼이 아닌 12 겨우 둘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세상에게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다녔고 먹었기에

마지막까지 불법자의 친구,

범죄자처럼 보이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부러가 아닙니다. 칼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지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제는 당신 습관대로 가지라고 최고한 두개면 족하다고 하십니다.

그냥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냥 성경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한 대로 그냥 두기 위함입니다.

죄인이 아닌데 범죄자가 아닌데 십자가에 명분을 주는 행위입니다.

오해를 당하고 모함을 당하고 그래서 끝이 십자가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오해가 있어야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함이 있어야합니다.

 

 

 

죄인들과 함께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고

모함 당하는 자들과 함께하는 이런 예수님의 오해들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칼을 전대를 신발을 배낭을 본질로 가지려합니다.

우리의 목적이 인생의 가짐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강도짓하는 칼을 가지는 것이 삶입니다.

 

 

 

아닙니다.

 

 

칼도 전대도 신발과 배낭도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 남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남기기 위해 그렇게 보이기도합니다.

불법자의 동류로 보이기도합니다.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합니다.

내실도 없이 아무 생각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합니다.

 

 

 

세상으로 보면 바보처럼,

세상으로 보면 미래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보이는 것과 실체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보였습니다.

죄인들과 다니니 죄인이고

범죄자들과 다니니 범죄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을 구하기 위해 죄인처럼 보이고

그러나 그는 범죄자를 구하기 위해

범죄자의 자리(십자가의 구원받은 강도)에도 섰습니다.

창기를 구하기 위해 창기 옆에 서섰고,

세리를 구하기 위해 세리가 오른 나무 밑에 섰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우리의 곁에 섰습니다.

그것이 비록 범죄자처럼,

죄인처럼 보인다 해도

성경은 그것을 예언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보입니까?

 

 

어릴적입니다.

어른들의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부자들하고만 지낸다"

 

 

나이가 들어 이제 제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서목사는 부자들과 지낸다"라는 말이 어울리는가?

 

"서목사는 가난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의 친구다"라는 말이 어울리는가?

 

 

 

 

고민이 많이됩니다.

나는 누구와 친한가가 나의 실체입니다.

 

 

 

그것은 말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왔던 삶의 돌아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그분의 말씀처럼 '작은 '입니다.

그분은 그래서 작은자들의 친구였고

작은자들을 돌아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을 자꾸 자를 옆에 두려합니다.

그래서 내가 때문에 사람처럼 보이려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자처럼 보이는 !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여야합니다.

그러려면 세상에서 범죄자들처럼 보여야하고

작은자처럼 보여야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야하고

없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늘 칼을 들라고 하신 핵심입니다.

 

 

 

당신은 작은자의 친구입니까?

아니면 큰자의 친구입니까?

 

 

 

예수님은 일부러 범죄자의 친구처럼 보이기 위해 칼을 들라하십니다.

그것이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인의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죄인의 친구가 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 옆에 누가 있습니까?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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