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와!(눅22:14-23)
예수님에게 '자신'(myself) 은 없습니다.
그분의 삶은 하나님과 성령님과 뜻을 정하고
아들인 자신이 고난의 세상에 오셨습니다.
영광도 아니고 대접도 아니고 높은 자리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에게 자신의 영광은 이 땅에서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고난과 성령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가 완성되어야
하나님과 성령의 연합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은 자신에게 전부를 거셨습니다.
믿음입니다.
두분 하나님은 예수님을 철저히 믿으셨고,
예수님은 두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믿었고 그래서 자신(myself)은 없습니다.
말구유에,
부모가 능력이 없어 길거리 여관도 안되어 구유에서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터를 잡지도 못하고 세상 권력을 피신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애굽으로 떠났고,
갈리리로 가셨고,
나사렛이란 촌에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여우도 제비도 제 집이 있지만
인자는 거처할 곳이 없어 머리 둘 곳도 없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순간순간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자신'은 없습니다.
오직 '너'
오직 '너희'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22:15)
고난의 목적은
'너희와'입니다.
말구유에 태어나도
부모가 능력이 없어서 길에서 태어나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쫓겨 다녀도
동물도 집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집이 있는데
자신은 거처할 곳이 없어 머리 둘 곳도 없이 다니는 인생이지만
비록 눈앞에 죽음의 십자가가 있지만
그분을 그렇게 버티게 만든 힘은 바로
'너'
'너희'입니다.
그래서 고난 전에 '너희와'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함께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고난도,
아픔도,
쫓김도,
외로움도,
머리 둘 곳 없음도,
그리고 십자가도
모두다 임마누엘임니다.
함께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너'
'너희'
'너희 와'입니다.
고난과 아픔이 고난과 아픔으로 끝나는 이유는
고난의 방향
아픔너머에 '너희'가 없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저 하늘에서 이 땅을 향하여 예수님을 파송 하시면서 주셨던
명확한 목적 하나는 '너희'입니다.
그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 안에 온전히 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목적,
십자가의 뜻인
'너희'가 내 앞에 있고
나의 뜻은 '너희 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당하는 수고와 열심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여야합니다.
'나'는 없어져야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위대한 뜻은 '너희'입니다.
그래서 '너희 안'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너희와'를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원하고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22:15)
고난 받기 전
예수님의 가장 원하는 것은 '너희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늘 '나'입니다.
나의 자리,
나의 높아짐입니다.
'너희'로 사는 사람과
'나'로 사는 사람은 뭐가 다른가요?
'나'로 사는 사람은 내가 채워야 하고
'너희'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나'로 사는 사람의 남는 것은 자신이고
'너희'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전부입니다.
온 세상입니다.
그래서 '나'를 살았던 가롯유다와 대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제자들이라도
남는 것은 오직 '나',
남는 것은 오직 불안,
남은 것은 오직 외로움과 절망입니다.
남는 것은 오직 허무입니다.
그러나 '너희'와 '너희와'를 산 예수님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의 권세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길입니다.
'나'로 시작한 세상에
'너희' 그리고 '너희와'를 세우기 위해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께서 오늘
'너희와'함께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하십니다.
겨우 다락방 하나 얻은 것이 아닙니다.
겨우 물동이 들고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원하고 원하였던 것,
'너희'
'너희와'를 이루기 위해
수 없는 '나'를 부인하고,
세상이 수없이 나를 유혹할 때도
오직 '너'
오직 '너희'
오직 '너희와'를 이루기 위해
참고 참으며
견디고 견디며
원하고 원하였던 것입니다.
아픔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예수를 아는데
'나'로만 사람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적도 보았는데
죽은 자가 살아난 것도 목격했는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도 했는데
아직
'나'로 밖에 살수 없는 아픈 가슴으로 사는
외로운 영혼으로 사는
'나'의 영혼들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그렇게 땀 흘리며 사는데
아직 내 안에
그렇게 원하고 원하셨던
예수님의 '너희'가 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가 온전하기 위해서
'너희와'가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의 '나'는
먼저 두분 하나님과 먼저 '너희와'가 되었습니다.
이미 하늘의 뜻은
성부하나님과 성령하나님과 이 땅에 남겨지신 성자예수님의
'너희'가 온전하여 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세상에 함께함을 이루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하나를 위해
'너희와'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온전한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3]
그래서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잔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피로 세우는 언약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몸과 피는 '너희와'를 이루는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가롯유다는 '너희와'를 거부한
함께함을 거부한,
'나'의 아픔입니다.
'나'는 죽음입니다.
'너희'는 생명입니다.
성찬은
'나'에서
'너희와'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언이며 선포이며
'나'를 포기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가 드러나면 망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가 없어도
'너희와'가 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는 공간입니다.
아픔입니다.
'너희와'가 이제 자꾸
'나'가 되려합니다.
'나'는 '너희와'로만 완성됩니다.
이미 세상은 '나'가 되어서 망했습니다.
그 망한 세상에 하나님은 다시
'너희와'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완성을
다시
'나'로 파괴하려는 가롯유다가 교회 안에 너무 많습니다.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위에 '라고 합니다.
'나'를 파는 자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아픔입니다.
인생의 목적,
삶의 열심,
땀의 방향이
'나'라면 나는 가롯유다 예수를 판자이며
'너희와'의 인류역사를 이끌어오신 하나님의 역사를 파괴하는 자입니다.
수 천년을 '너희와'를 위해 일해오신 삼위하나님의 그 경륜을
우리는 다시 '나'로 파괴하려 합니다.
'너희와'를 파괴한 것은
'너희'보다 강한 '나'입니다.
'나'가 오직
'너희'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기 싫은 유일한 한가지는
'나'입니다.
아담의 독처입니다.
그래서 '너희'를 만들고
부모를 떠나 '너희'를 이루어 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온 우주만물 창조세상을 깬 것은 다름이 아닌
'나'입니다.
'나'는
'너희와'보다 강합니다.
그래서
'나'를 깨뜨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철저히 '너희'를 사셨습니다.
하늘에서부터
그리고 이 땅에서!
'나'가 얼마나 무섭고 질긴지
그리고
'너희'를 파괴하는 것이 너희가 아니라
바로 '나'임을 죽을 만큼 알아야합니다.
가룻유다는 그 너희안에
오직
'나'를 위해 살다간 세상의 상징입니다.
아니 세상의 영에 속은 '나'의 대표입니다.
가롯 유다는 바로 '나'의 상징입니다.
그 '나'만 세우는 세상에
오직
'너희와'를 이루기 위해 나의 주님 그리스도가
오늘 피와 살을 우리를 위해 드리셨습니다.
"원하고 원하였노라"
"이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의 감사는 '너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
성부 하나님의 일하심,
성령의 역사는 오직
'너희와'입니다.
당신의 '너희'는 누구입니까?
그것이 없다면
당신은 아직
'나'로 대표하는 가롯유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