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따르느냐입니다. (눅22:1-6)
세상과 복음은 무조건 반대의 길입니다.
세상은 무조건 자신이 주인되어야 하고 왕이 되어야하고
예수님은 무조건 섬기고 낮아지고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복음은 반대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방향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도 예수님을 죽여야하고
하나님도 예수님을 죽이셔야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같은 마음입니다.
같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유다와 마음을 같이해서 거래를 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가롯 유다를 이용하고,
가롯유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을 이용합니다.
세상은 이용하는 영입니다.
세상의 영은 하와를 이용했고 아담을 이용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자신의 뜻을 위해 가롯유다를 이용하고
가롯유다는 또 그들을 이용합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모두 자신의 주임됨,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겉으로 다른 어떤 명분이 있어도
속내는 '이용'이고 목적은 '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할 때
'자신'과
'이용'이라는 것에 늘 유의해야합니다.
목적이 선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이용하면
결국 마지막은 자신을 세움입니다.
가롯유다와 대제사장 서기관의 목적은 예수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고 나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목 베임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합니다.
같은 죽음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죽이고
하나님의 죽임은 살리기 위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도 부활시키시고
세상에 가장 존귀한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살립니다.
그러나 가롯유다와 대제사장 그리고 서기관의 죽임은
다 죽이는 것이고 '자신'만 살려하는 죽음입니다.
아담의 영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살려했던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 하와도 내가 살기 위해 버리는 세상영의 속성입니다.
자신만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죽이든지 죽든지 해야합니다.
죽이면 살 것같지만 나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죽어야 다 살리는 묘책을
세상에 내놓으시고 예수님을 그 길로 가게 하셨습니다.
이용하느냐,
자신을 위해 사느냐는 내가 죽느냐 내가 죽이느냐로 결정됩니다.
복음을 모를 때는 내가 죽여야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나도 살고 세상도 삽입니다.
성령은 나를 죽이는 영 입니다.
성령은 내 영은 살리고 세상에 대한 나의 욕심은 죽이는 영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따를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육체에 대한 것은 죽이는 영입니다.
성령은 예수님도 광야로 인도하시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셔서 하늘로부터 소리를 주셨습니다.
변화산에서도 성령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이끄십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도록 인도하십니다.
광야는 우리를 죽이지만 살립니다.
광야를 지나야 성령의 인도를 따라갑니다.
광야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소욕을 죽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따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성령의 인도를 따른 죽음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가롯유다의 성령을 따르지 않는 죽음은
오직 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의 소욕을 따른 마지막은 다른 사람을 죽임이지만
결국 나의 영원한 죽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면 자신의 뜻이 이루어 질것 같지만
결국 가롯유다도 비참하게 죽고 대제사장과 서기관의 자리 확보는
성전의 파괴로 나라와 민족도 다 없어졌습니다.
죽기 위해서 온 예수님과 살기 위해서 죽이는 사람들은 이미 시작이 다릅니다.
그래서 끝은 더더욱 다릅니다.
섬기기 위해서 오신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게 위해오신 예수님과
유월절 어린양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대제사장과 사람들은 반대입니다.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결국 '자신'을
위하는 사람과 이용 당하기 위해
죽음을 알면서도 자신을 드리는 예수님의 길을 묵상해야합니다.
성경은 늘 두 가지 길을 보여줍니다.
자신을 '위해 '
그리고 자신을 '드림'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려합니다.
육체를 따르냐 성령을 따르냐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따라 유월절을 예비합니다.
죽음을 예비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유월절을 육체를 따라 다른 사람을 죽이기 위해 예비합니다.
우리의 예비는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면 성령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육체로 시작하면 나라도 민족도 망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나 육체로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입니다.
자신도 살고 세상도 살리는!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가롯유다는
육체로 시작했습니다.
자리로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뜻과 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입니다.
목을 매어 죽고
군인들에게 밟혀 죽고
그들이 그렇게 자랑하던 성전도 모두 죽었습니다.
왜 우리의 삶이
왜 우리의 사역이
왜 우리의 인생이 남는 것이 없습니까?
육체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서 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높은 업적
높은 이름
높은 성을 쌓으려는 세상의 영을 따라서입니다.
성령의 영은 낮아짐이고
성령의 영은 죽음이고
성령의 영은 온유입니다. (성령의 법칙1을 꼭 읽으셔야합니다)
모세의 온유,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하게 와서 배우라고 한것이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온유는 성격이 아닙니다.
모세가 성격이 한성격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온유하기가 세상에 어떤 사람보다 더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한 성격합니다.
상을 엎고 사람들을 좇아내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온유하니 내게 배우라합니다.
온유함이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더하다고 합니다.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 길을 준비하고 계획하고 그래서 걸리는 모든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종으로 사는 사람은
주인이 원하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성령입니다.
완전한 주인으로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사람을 죽입니다.
말로 죽이고
실족케해서 죽이고
용서하지 않아서 죽이고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죽입니다.
다 자기가 주인인 인생의 결과입니다.
성령입니다
거듭 말씀합니다.
성령입니다.
온유는 성령입니다.
온유는 착함이 아닙니다.
온유는 성격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항상 웃는 얼굴이 아닙니다.
온유는 성령입니다.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종의 자세,
종의 마음입니다.
우리 인생은 오직
성령을 따르느냐
내 영,
즉 세상의 영을 따르느냐의 싸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