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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와 영원

잠시와 영원

 

 

 

 

 

 

 

 

 

 

                   잠시와 영원(눅21:20-28)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성을 잃어버린 자들은 결국 그들이 향하던 방향에 있던

세상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죽입니다. (20,24)

 

우리는 에덴에 있었어야 했습니다.

에덴에 있다는 것은 방향성과 관계성입니다.

방향성과 관계성의 기초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기초가 사라지면 하나님을 향하던 방향은 자신을 향하게 되고,

하나님을 주목하던 눈은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되고,

자신의 벗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던 방향성이 자신을 보게 되자 관계성은 사라집니다.

사람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보게 되니 함께 살던,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인 하와와도 관계가 깨어집니다.

 

믿음의 회복이라는 것은 방향성의 회복과 관계의 회복을 말합니다.

내 안에 믿음이 회복되면 나를 향하고 세상을 향하던 시선과 삶의 방향이 하나님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아니 보지 못하던 눈이 눈이 열리니 자연스럽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아직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이웃이 보이지 않는 것은 방향성과 관계 즉 믿음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종교생활이 아니라 방향성과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 방향성과 관계성이 세상을 향하던 이스라엘이 그 방향에 있던,

세상에 있던 군대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알아야합니다.

세상을 향하던,

자신을 향하던,

하나님이 아니 다른 어떤 것을 향하던

그것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영원에 대한 영혼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다른 것은 다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높이 쌓은 성,

그래서 높은 나의 자리,

그래서 안전하다고 믿은 나의 자리는 결국 떠나야 하는 자가 됩니다.

그날에 떠나라고 합니다.  도망하고 성을 나가고, 촌에 있는 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21)

 

내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그렇게 추구하던 상징인 성전은  떠나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방향입니다.

관계입니다.

 

어떤 자에게는 그 심판은 멸망이 되지만

어떤 자에게는 구속, 속량이 되는 날이 됩니다.

 

어떤 자는 방향의 끝을 보게 되고

어떤 자는 방향의 시작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 땅을 정리하신다 했습니다.

멀리 떠난 주인,

나라를 준비하러 간 왕,

달란트를 맡긴 주인,

모든 것이 잠시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잠시를 영원으로 여기고 영원히 살 것으로 착각한 사람들이 그제야 알게 됩니다.

잠시,

여기는 잠시라는 것을!

 

내가 가진 자리도, 

내가 가지고 싶어하던 그것들도,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도 오직 잠시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31)

이 세상 나라가 망해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옵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려면 세상 나라가 망해야합니다.

당연합니다.

 

원래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세상 나라는 잠시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이 보입니다.

그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 잠시를 영원으로 착각하니 영원한 것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아픔입니다.

아프면 잠시를 향하던 나의 눈이 영원한 것을 보게 됩니다.

외면하던 인자가 구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을 보게됩니다.

 

종말만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하던 나의 방향이

깨어진 나의 관계가

이 땅에 아픔과 곤고와 혼란과 무서움이 임하면

예수님이 보이고,

하나님이 보이고,

이 세상이 잠시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방향성이 바뀌고 관계가 바뀝니다.

 

이 땅의 아픔은 영원을 여는 비밀 문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지구상에도

아픔은 영원을 여는 비밀통로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나의 방향성도,

관계성도

바뀌게 됩니다.

 

문제는 아파도,

힘들어도

세상이 잠시인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세상이 잠시인 것을,

인생이 영원을 준비하는 곳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나의 인생이 잠시에 대한 시각에서 영원에 대한 시각을 여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서 그 잠시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정말 세상의 마지막 때에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오늘 열어야합니다.

오늘 내가 잠시의 것들을 영원으로 여기고 사는 착각의 삶을 내려야합니다.

 

그래서

사랑해야한다고 말해야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좋아한는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살아야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하라는 계명은 진리입니다.

아픔이 올수록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나누며 살아야합니다.

 

나누어야합니다.

내가 쌓으려고 했던것을 나누어야합니다.

 

관계입니다.

관계의 끝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다 이루는 것입니다.

 

마지막을 볼 수록,

잠시의 눈이 열릴수록

우리는 관계의 끝인 사랑을 해야합니다.

 

세상은 세상에 임할 일로 무서워하고 기절한다고 합니다.(26)

그러나 관계 즉

영원의 시각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은 무섭지도 기절할 일도 없습니다.

잠시의 눈을 가지면

영원이 열릴 때 기절하고 무섭지만

영원의 준비는 오직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랑 해야합니다.

마지막을 볼수록 그러해야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마지막이 될수록 영원을 아는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방향성의 끝, 관계의 끝을 아는 사람의 일입니다.

 

종말론자들처럼 마지막이라고 다 버리고 다 포기하고 자신들의 면류관을 위해 현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사람에게

내가 아는 자리에서 더욱 사랑과 선행으로 다가가는 것이 종말입니다.

 

 

오늘 사랑한다고 전합니다.

오늘 착한 일, 선한 일로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그래서 잠시에 눈을 두고 사는 사람과

영원에 눈을 두고 사는 사람의 다른 것을 보여줍시다.

 

그것이 종말, 즉 마지막에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드리는 길입니다.

 

 

 

 

 

 

* 순교당한 파니 전도사 가족입니다.

네명이 시작했다 이제 두명이 남았습니다.

막내는 물도 전기도 없는 곳에서 2살때 병으로 죽었습니다.

파니는 무당에게 심방가다 총맞아 천국을 갔습니다.

 

잠시를 살지만

이 세상이 잠시인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영원에 눈을 두고 살면

이 세상은 다 떠나야 하는 곳인 것을 압니다.

막내 딸과 아버지가 영원의 집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잠시를 사는

남은 딸과 아내가 애처롭지만

그래서 응원을 가득 담은 격려의 박수를 지금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잠시를 사는 이들과 더불어 사랑하고

선행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평생 내가 책임지고가야 할

영원의 친구들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