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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9-18)

 

 

 

죄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아도 스스로 어쩔 없는 것이 죄의 습성입니다.

죄는 시작만 하면 죄가 죄를 만들어냅니다. 스스로가 아니라 스스로를 제어하는 죄가

, 반복되는 죄로 이끌어갑니다. 하고 싶지 않고 그렇게 원하지 않지만 죄는 자꾸 깊은 수렁으로 끌어갑니다.

 

포도나무주인이 농부에게 세를 주고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종을 보냈는데 종을 죽이고 이후에 종도 죽이고 아들까지 죽여서 세를 주지 않으려다 이제는 유산까지 가지려고합니다. 그것이 죄의 습성입니다.

 

죄의 습성은 ""입니다.

 죄는 나를 원합니다. 죄는 어떤 물질이 아닙니다. 죄의 습성은 자신입니다. 그래서 내가 안에서 살도록합니다. 한번 맛본 죄는 죄를 부르고, 결국 나를 죽여야 끝이 나는 것이 죄의 습성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죄는 ""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대로 렌트를 했습니다. 빌린 것이지요. 임대를 것입니다.

주인이 허락해서 일을 하는  농부들입니다.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농사를 하고 손에 돈이 들어오니 욕심이 생깁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겁니다. 사람은 시작할 , 없다가 뭔가를 손에 넣을 때는 너무 감격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내가 주인인 것처럼 생각되어 가지고 싶어집니다.

 

죄의 본질은 "" 했습니다.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고,

쌓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땅입니다.

삶의 터전입니다.

주인으로부터 렌트 받은,

위임 받은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전부 달라집니다.

작은 소출이 욕심이 났는데 결국 , 포도원까지 유산까지 욕심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들이 주인행세하고 주인이 왔는데 그를 버리고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새로운 건축,

주인을 버리고 아들을 버리고 새롭게 짓는 건축을 위해 버린 돌이

하나님의 나라에 머릿돌로 만드시는 역사를 지금 세우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니 듣던 사람들이 농부를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하니 주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버린 사람들,

포기한 사람들,

세상이 외면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건축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없는 화해와 용서와 회복을 위해 그분의 종들 선지자들을 보내었지만,

세상은 그들을 죽이고 버리고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들의 배만 채우고 그들의 안락과 즐거움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세상을 빼앗을 작정입니다. 그래서 버린 돌이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버린 ,

세상이 죄인이라 하는 ,

보지 못하는 ,

외면 당한 ,

아파하는 자를 부르셔서 포도원을 채우실 것입니다.

 

기둥,

모퉁이 (당시 건축은 면의 모퉁이에 기둥을 세우고 벽을 세워가는 건축법으로 모퉁이가 기둥이 되어 세우는 건축양식임) 예수님을 통해 포도원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모퉁이 돌과의 충돌이 세계에 임하게되는 것을 설명하십니다.

 

포도원을 빼앗은 종들과

다시 찾으시는 모퉁이 돌과의 싸움이 지금 현재의 세상역사입니다.

 

그래서 싸움입니다.

죄의 본성은 ""이기 때문에 이미 자신이 누리고 있는 포도원인 세상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아니 많이 높이 크게 가지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버린자들,

포기한 자들,

외면당한 자들,

죄인들,

억눌린 자들을 통해 포도원을 다시 찾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미련한 방법이라 표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고

포기한 자들이고

외면 당한 자들이고

죄인들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버린 것을 통해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는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주인행세하고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자들은 아직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버린 돌을 취하여 그분의 나라를 다시 회복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리는 버린 ,

우리는 버린 수입니다.

 

세상이 버려야 주님이 맞으십니다.

돌아온 탕자는 세상이 버린 자입니다.

그러나 집에 있는 아들은 영원히 포도원을 포기하지 못하는 탕자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이 버린 자들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다 스스로 고백하고 자백하는 죄인들을 찾는 것입니다.

 

죄는 자신이 죄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죄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자존심입니다.

죄인이라고 포도원에 소출이 있을 때는 절대 고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라는 세상에 대한 소망이 있어서입니다.

세상에 대한 실낱 같은 희만만 보여도 절대 "" 포기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소망이 끊어지고 ""라는 것이 없을 나에게 희망이 세상에 소망이 없을 "" 포기하게 됩니다. 그때 그도 모퉁이 돌처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은 세상에 ""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아직 실력으로,

학력으로,

자신의 똑똑함과 능력으로 뭔가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인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잡고자 했지만 백성이 두려워서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어제도 생각했지만, "" 붙잡는 사람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 빼앗길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죄의 상태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완전히 죽음으로 죽여야 하는데 자꾸 두려움에 자신의 "" 물을 타려하니 덩치만 커지고 감당할 없는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두려움의 실체처럼 보이는 예수님을 잡고 죽이려 하지만 두려움의 실체는 외부, 다른 사람이 아니라 , 자신의 자아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면, 십자가와 함께 죽지 않으면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완전한 죽음이 완전한 평강으로 인도합니다.

 

주인의 싸움입니다.

주인이 아닌데 주인행세를 하니 두려움입니다.

죽음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인데 죽음이 우리의 주인행세를 하니 두려움입니다.

죄의 실체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입니다.

 

포도원의 핵심문제는 주인이 누구냐의 문제입니다.

죄는 근본 해결은 주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꾸 선행을 함으로

우리는 자꾸 노력을 함으로

우리는 자꾸 눈물을 흘림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아닙니다.

죄의 문제의 근본 해결은 주인의 문제를 해결 해야합니다.

내가 오늘 주인으로 내가 아닌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회개의 돌이킴만이 두려움, 죽음의 어둠에서 벗어날 있습니다. 외의 어떤 것도 마음의 허전함과 마음의 외로움과 마음의 양심의 가책을 해결할 없습니다.

 

포도원 농부들의 문제는 소출이 아닙니다.

포도원 농부들의 문제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입니다.

 

주인으로만 인정하면 해결이 되는데 자꾸 자신이 주인행세 하려고하니 반복적으로 오는 종도, 아들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라는 죄의 본성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꿈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의 꿈과 목표는 포도원에 주인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인정되고 주인이 주인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렌트를 것인데 주인처럼 사용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렌트입니다. 포도원을 위해 얻어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것인양 시간도 쓰고

그런데 것인 돈도 마음대로 씁니다.

 

주인의 문제입니다.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소유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 종을 죽여야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 아들을 죽여야합니다.

그래야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

불안하지 않은 것이라,

내가 누리는 것이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에 주인을 인정해야합니다.

공간의 주인을 인정행야합니다.

물질, 돈에 주인을 인정해야합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라는 것에 노예가 되어서 모퉁이 돌과 싸우는 전쟁을 해야합니다.

죄를 몰라서 못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누리는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죄를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

그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은 사랑입니다. 네가 다른 모든 것보다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영적인 단계는

주인을 정말 모르는 단계가 있습니다.

 

주인을 알지만 모른체하고 싶은 단계입니다.

 

주인을 인정하고 포기하는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단계에 와있습니까?

 

주님은 주인을 알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은 단계를 지나 정말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단계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제자에게 원하시는,

그것이 포도원을 넘겨주고 싶은 사람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주인이 누구냐의 문제는 결국 사랑으로 끝을 맺습니다.

사랑입니다.

 

"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최종 목표입니다.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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