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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귀인가?

왜 나귀인가?

 

 

 

 

 

 

 

 

 

 

 

 

나귀인가?  (눅19:28-44)

 

 

나귀를 타야하는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왕위를 이야기 하고 종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한다.  왕인데 왕이 아닌것처럼 보이게 한다.

아니 세상의 영은 정말 왕으로 보여야 왕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왕은 땅에서 무엇을 하느냐로 진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조차도 세상에서 왕으로 서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께서 준비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왕위를 원하셨기에 세상의 법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믿음으로 세워지는 길인 나귀를 타신 초라하고 낮은 자리를 통해 오시는 것이다.

타락의 핵심은 높아짐이이다. 예수님은 낮아지심으로 세상의 영이 추구했던 상향성의 반대인 낮아짐을 추구하시는 것이다. 낮아짐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성질이다.

 

말구유인가?

나사렛인가?

나귀인가?

갈릴리인가?

죄인들과 먹고,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는가?

 

왕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땅은 세상의 , 세상의 영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세상 나라에 하나님의 법을 새롭게 새워 법을 믿음으로 보고 따르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진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그곳에서 고을의 권세를 누리는 사람으로 세우는 기준을 땅에서 세우시는 것이다.

열매, 길을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임해야한다.

세상은 이미 타락되어졌고 세상은 이미 높음과 자랑과 쾌락과 허무로 채워진 나라다.

나라에서 믿음의 길을 사람만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서 상속자로 서는 것이다.

 

예수님은 길을 가장 먼저 믿음으로 가신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나귀를 선택하시고 왕으로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겸손의 ,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직접 걸어가시는 것이다.

 

높음과 자랑과 자신이 왕으로 사는 사람은 절대로 가지 못하는 길이 바로 나귀를 타는 것이다.

지금이 아닌 앞으로 임할 하나님나라를 믿는 사람만이 땅에서 나귀를 타고, 구유에 나고, 나사렛에서 살며, 목수로 살수 있고,  가난한 자와, 죄인들과 세리들과 지낼 있다

이것은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를 믿는 자만이 드리는 믿음의 증명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음에 대한 증명을 나귀로, 말구유로, 갈릴리와 나사렛에서 사심으로 증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동일한 권세를 주시기 전에 땅에서 믿음의 증명을 보인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람들에게 나라를 주신다.

권세를 주시기 땅에서의 믿음의 삶을 통해서 주신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다.

아무나, 주고 싶은 사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믿음의 증명을 이룬 사람에게만 주신다.

그래서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하시는 것이다.

 

믿음의 증명은 세상의 영이 세운 반대로 가는 사람이다.

말은 하나님은 땅에 세상의 영이 세운 반대로 가는 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법을 만드셨다.

법은 나귀를 타는 것이다.

낮은 자리에 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다. 그러나 땅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믿음의 증명을 해야 하고 길을 열어야 하는 임부를 완수 하셔야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삶과 죽음에서 열매가 되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삶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철저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 삶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그리고 세상의 앞에 증명하셨다.

 

예수님은 철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우리는 주님의 길을 믿음으로 동일한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누리는 축복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에서 살수 있고 누릴 있고 상속 받게되는 모든 기준을 믿음으로 정하셨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 나귀를 타고, 죄인들과 세리들과 지내고 삭개오와 같은 물질을 놓게 된다.

 

이것이 믿음의 증명이다.

기억해야한다. 믿음인가? 아담이 잃은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 날의 운행 법칙은 믿음이다.

믿음의 증명이 땅에서 나귀를 타는 것이다.

 

나귀를 왕을 누가 인정하는가?

 

왕위를 싫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의 방법을 인정하지 않던 므나를 받은 종은 나귀를 , 주인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고을 아니 다섯 고을 아니 고을의 권세도 없다. ? 왕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믿음으로 므나를 쓰지 않아서이다.

 

세상에서의 모든 것은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도록 하나님이 새로운 창조를 하셨다.

나귀를 타는 예수님, 십자가에 죽는 예수님, 고난 당하고 채찍 당하는 예수님을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이다. 절대 말도 안되는 것은 세상의 영이 가진 합리와 이성의 접근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도 안되는 것을 하나님은 숨겨진 것으로 역사하셨고 숨겨진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되게 하셨다.

그래서 자신의 성전인 예루살렘을 들어가면서 나귀를 타셨고 초라한 모습으로 가신 것이다. 세상의 영이 추구하는 반대를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아담이 놓치고 실패한 낮아짐, 섬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삶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아담이 실패한 것을 회복하는 사람이 들어간다. 길을 처음으로 주님이 가셨고 예수님이 가신 길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만이 믿음으로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사람을 왕권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열고을 권세로 높이시는 것이다.

 

작은 것이다.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다.

높은 ,

자랑할 한것,

세상에서 나가는 것이 아니다.

 

나귀를 타는것처럼,

죄인들과 세리들과 지내는 것처럼

작은 것이다.

 

볼품 없는 ,

초라한 ,

다시 돌려 받을 없는 모든 작은 것을 드릴 있는 사람이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를 믿는 사람이라는 증명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하늘의 뜻을 아셨고 뜻을 이루기 위해 친히 나귀를 타시고 초라한 왕으로 자신의 왕국인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땅에서 왕됨은 나귀를 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새롭게 세우시는 나라의 법이다. 법을 예수님이 믿음으로 걷는 것이다.

 

 

그럴 그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고백한 내용은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19:38)

 

이들이 고백한 것은 하늘이다. 높은 곳이다. 땅에서는 알지 못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나귀를 타고 오시는데 하늘의 평화와 높은 곳의 영광을 찬송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곳에 평화가 있고 영광이 있다. 진정한 영광은 땅에서의 높아짐이 아니다. 진정한 영광과 평화는 땅에서의 나귀를 타는 것이다. 낮아지는 것이다. 섬기는 것이다. 그것이 새롭게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다.

 

그렇지 않던 삶을 살았던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눈물의 이유가 된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하나도 위에 남기지 못하고 파괴되고 멸망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의 승리는 나귀를 타는 것에 있다. 낮아짐에 있다. 낮아질 하나님이 간섭하고 낮아질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일하시고 돌보시는 것이다.

 

 

나귀다.

나귀는 타신 예수님은 믿음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먼저 걸어가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법을 내가 믿고 나도 그렇게 나귀를 타고 사는 , 아니 내가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되어서 함께 낮은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한번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사람들이 소리지고 환호하니 자신을 향하여 환영하고 소리지르고 왕으로 인정하는 줄로 착각하면 된다. 우리 등에 예수님이 평화와 영광의 본체이다.

영광을 가로채고 내가 높아지려는 조금의 생각도 있다면 예루살렘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이 되는 것이다.

 

나귀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을 태운 나귀가 되어야한다.

거기에 하나님 나라의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생명의 길이 있다.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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