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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를 통해 초대교회를 봅니다

삭개오를 통해 초대교회를 봅니다

 

 

 

 

 

 

 

   삭개오를 통해 초대교회를 봅니다. (눅19:1-10)


주님을 만났다고 다 구원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지는 않는다.

삭개오는 주님이 자신을 찾아오자 앉지도 않고 서서 회개한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자에게
그리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한다.

거기에는 눈물이 없다.
거기에는 통곡이 없다.

그냥 즐거워하면 영접만 있다.

회개는 눈물이 아니다.
돌이킴이다.

앞장에서는 쭉 믿음을 이야기 했다.
믿음의 목적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말씀하신다.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하셨다.(10)

잃어 버린자가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보여준다.

돌이킴이다.
회개라는 말보다 나는 돌이킴이라는 말이 더 좋아 보인다.
더 근사해 보인다.

회개는 한국 사람에게 감정적 고백 정도로 여겨진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회개하면 눈물 콧물을 쏟아내는 것을 생각한다.
그런데 눈물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찬양에 목숨걸고 찬양하면 아무것도 없고 더큰 허전함으로 더 강렬한 어떤 것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데 오늘 삭개오에게 눈물이 없다.
그런데 그가 회개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철저히 회개 즉 돌이켰다.

삶의 방식의 돌이킴이고
물질의 돌이킴이고
방향의 돌이킴이다.

눈물이 없어도 주님은 구원의 선포를 하셨다.

우리가 주목 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은 돌이킴의 삶의 회복이다.

예수를 믿는다.
그런데 무엇을 돌이켰는가?

예수를 만났다고 구원이 이르렀는가?

돌이킴이 없는 삶은 회칠한 무덤이 된다.

소유의 절반,
가난한 자들에게,
속여 빼앗은 일,
네 배의 보상!

이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돌이킴은

첫째, 소유권의 이전이다.

둘째, 주님의 사람들을 향함이다.

셋째, 삶의 방식의 변화이다.


소유의 이전이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을 향하지 않는 돌이킴은 가짜다.
마지막으로 살아왔던 삶의 방식의 변화가 없는 돌이킴은 회개가 아니다.
나를 위해 살던 삶의 방식에서 주를 위한 삶의 방식으로의 변화이다.

주도 만나고
구원의 감격도 맛보고
신앙생활도 곧잘 하는 사람들이 모인곳이 교회가 아니다.

돌이킴의 세가지 변화가 없다면 교회가 교회가 아니고 성도가 성도가 아니다.

이 모습은 바로 초대교회,
성령을 체험한 초대교회의 모습 그대로다.

그들의 각각 자기 소유를 내놓았고,
가난한 자들과 필요를 따라 나누었고
자신을 위해 살던 삶의 방식을 주를 위하여 사는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성령이 임하고 나서 그들이 변한 모습은 오직 그것이다.
이것이 교회고 이것이 그리스도를 만난 아브라함의 자손의 돌이킴이다.

개인과 교회의 회개 즉 돌이키과 구원의 표적은
삭개오의 돌이킴과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 명확하게 알수 있다.

이런 돌이킴이 없는 교회와 개인은 믿음이 없음을 의미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상한 것은 주를 만나 회개한 기록중에 눈물로 콧물로 얼룩진 곳이 없다.
기쁨이고 감격이고 평안이다.

다만 돌이킴의 현상만 있을 뿐이다.
한국 성도처럼 감정을 의존하는 민족도 없다.

감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돌이킴의 핵심을 잡으면 기쁨은 자연히 온다.

감정만을 자꾸 반복적으로 채우려니 더 큰 공허가 온다.
돌이킴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신실하게 주를 의뢰하게 만드는 감정적 충만을 만든다.

돌이킴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거듭되는 공허로 자꾸 허약한 신앙인으로 만든다.


돌이킴이 없는 구원은 힘없는 교회다.
돌이킴이 없는 선포는 없고
돌이킴이 없는 회개는 예수님 없는 잔칫집과 같다.

 

그런데 삭개오가 어떻게 이런 돌이킴을 하게 되었나?
내적인 상태가 어떠했길래 예수님이 찾아오시자 이렇게 변화되었나?
예수님이 오신다고 아무나 다 이렇게 되나?

죄인의 식이 있는 사람은 주님의 찾아주심은 곧 감격이다.
그러나 의인의식이 있는 사람은 주님의 찾아주심은 짐이다.

삭개오는 죄인의식으로 부끄러움 속에 살았다.
그런데 주님이 자기집에 온다고 하니 기뻐하며 영접했다고 한다.
 
감격이다.
자신이 누구보다 자신을 안다.

죄인인데,
세상에서 잘나가지만 부끄러운 죄인인데 거룩한 주님이 나에게 오신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이다.

우리에게 이 감격이 없다.
아니 우리에게 이 죄인의식이 없다.

세상적으로 돈 많고 잘나가도 삭개오는 이 죄인의식으로 주님 앞에 섰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적으로 돈도 없고
세상적으로 가진 것도 없는데
의인의식으로 산다.

그래서 주님이 찾아와도 감격이 없다.
늘 하던 예배,
늘 하던 헌금,
늘 하던 의식이 그냥 의식이 된다.

죄인의식은 우리를 늘 감격으로 인도한다.
다른 사람을 많이 정죄하는 사람치고 감격으로 사는 사람이 없다.
다른 사람을 많이 비판하는 사람치고 감격의 눈물이 없다.
다른 사람을 많이 흉보는 사람치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거룩한 뜨거움이 없다.

죄인의식, 철저한 죄인으로서 주를 만나는 것이 돌이킴을 가지는 지름길이다.

삭개오는 죄인이다.
잃어버린 자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 인식했다.
주님은 오늘 그런 죄인의식을 가진 자를 만나기 원하신다.
거기에 주님의 선포가 있다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 작년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구역에서 드롱콥교회 방문사진입니다.
이번달부터 각구역이 선교지 8개 교회를 방문하게 됩니다.
물질과 시간과 섬김으로
참 구원의 삶을 증명해가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해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