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과 인생에 실패한 이유 (눅18: 9-14)
우리가 인생과 사역에 실패한 이유는 용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직 용서에 전부를 거셨고,
... 우리는 오직 이기는 것에,
높이 올라가는 것에 전부를 건다.
용서와 믿음의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인가?
내가 저 사람보다 의롭다는 의인의식이다.
주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의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마3:2]
제자들이 사역도 이 회개를 선포했고 거기에 역사가 나타났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6:12-13]
최근 한동안 용서에 대해서 수 없이 이야기를 했다.
복음의 핵심과 십자가의 본질과 주님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용서라고.
그런데 우리에게 이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 본문은 왜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하는지,
왜 우리에게 용서가 안되고 믿음이 없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을 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의 의로움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자신의 죄인됨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오직 두 가지 믿음이다.
자신의 의로움 아니면 자신의 죄인됨!
"또 자기를 의롭다 믿고"(18:9)
왜 우리가 십자가를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가?
오직 자신을 아직 의롭다 믿기 때문이다.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가?
왜 다른 사람을 자꾸 문제 삼는가?
남보다 나를 더 의롭다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다.
자신이 의로다 여기는 것을 다른 말로 교만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오직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의 전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의롭다 여기는 자는 결코 부르지 않고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했다.
이 의는 나의 편에서 의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선언하시는 의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꾸 나의 의를 내세워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그래서 내가 저 사람보다 좀 낫다고 생각해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용서를 막는 걸림돌은 자신의 의로움이다.
언제나 그렇다.
지난 묵상에서 요나를 이야기했고 욥을 이야기했다.
요나와 욥의 차이는 둘 다 하나님의 의로운 자들이다.
그러나 요나는 끝가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했고
욥은 마지막에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친구들을 위해 제사를 드렸다.
신앙의 본질은
내가 죄인됨을 깨닫고 주님의 의로움으로 입는 것이다.
용서의 강을 지나 내가 이제 그 용서의 물줄기를 흘러보내야한다.
그런데 내가 남보다 낫다는 생각은 결코 용서의 물줄기를 흘려 보내지 못한다.
우리 신앙의 실패는 이 죄인됨의 고백 없이
우리의 열심의 결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에 실패하고 인생에 사역에 실패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업적을 이야기한다.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하고 이것을 하고 이것를 드렸고…
업적이 많아지고,
세상적 학문이 높아지고,
경력이 쌓일수록 버려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나를 버린다.
주님은 우리가 정말 죄인일 때 부르셨는데,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정말 죄인이기 때문에 부르셨는데
이제 뭔가 좀 있으니까 그것 가지고 주님 앞에 나의 의로움을 자랑한다.
자랑하는 순간 주님은 우리를 모른다 한다.
우리 손에 의로움이라는 어떤 것이 잡혀있을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버림 받는다.
그래서 자랑하는 자는 망한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의 것을 자랑치 않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자랑하지 말고 사랑해야한다.
사랑은 나의 낮아짐이고 나의 약함이고 나의 죄인됨이다.
교회의 문제는 회개를 지나지 않고 복만 강조해서 모인 사람들이 많아지면서이고
죄인으로 시작했다 스스로 의인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이다.
자리가,
위치가,
명예가,
업적이,
나의 봉사가,
나의 헌금이,
나의 직분이 우리를 자꾸 의롭게 만든다.
거기에는 주님의 눈물만이 있다.
세리의 기도핵심은
죄를 지은자의 가난한 마음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가난함이 없다.
그래서 거기에는 주님의 용서가 하늘의 축복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로 나뉘고
죄를 용서받은 세리는 용서를 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용서를 알지 못한다.
아니 용서 받을 것이 없으니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용서해주어야 하는데 용서가 필요 없는 의인은 예수를 믿지 못한다.
믿음은 용서를 믿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요 핵심이다
그래서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을 말하지 말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말해야 한다.
이 시작이 틀리니 평생 복만 구한다.
거기에는 긍휼도 없고 자비도 없고 용서도 없고 참 하나님 나라도 없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죄를 죄로 인식한 곳에 구원이 있고 은혜가 있고 평강이 있다.
오늘 말씀은 믿음의 기도인 과부의 기도에 이어 나온 말씀이다.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으로 결론내고 오늘 말씀인 세리의 기도를 하신다.
참 믿음은 내가 죄인임을 날마다 고백하는 사람속에 있다.
그 믿음을 마지막에는 보지 못한다.
왜?
다 내가 의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대의 문제는 다 자신의 생각에 옮음이 많아지는 세상이 된다.
그러나 누구도 내가 죄인이고 당신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보지 못한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남을~~~~"
무슨 말인가?
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셨다.
다 남을 나보다 더 섬기라 하셨다
다 남을 나보다 더 잘 대접하라 하셨다
복음의 왜 이렇게 당연히 요구하는가?
나는 남보다 더 못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 의식을 잃은 기독교와 복음은 세상보다 못한 종교가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고
내가 남보다 못함을 아는 것이고
그 못한 자를 주님이 사랑하셔서 용서하신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용서의 강을 누가 지나는가?
누가 믿음 안에 거하는가?
누가 참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는가?
나의 죄인됨을 믿고
그것을 삶의 현장에는 세리처럼 눈물의 탄식을
남에게 보여주는 현장이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마지막 때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을 보겠느냐는 말이다.
이 고백이 없으면
가는 곳마다 의인의식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칼로
자신의 의로움을 사용한다.
같이 하나님을 믿지만
이런 바라새인적인 의인의식의 사람들 때문에
죄인의식을 가진 의인들이 더 많은 고통을 당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느꼈던
나의 죄인됨 오직 그것뿐이다.
이 의인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섬길 때 문제는 심각해 진다.
용서를 경험한 사람, 죄인 의식으로 용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아직 용서를 알지 못하는,
용서의 삶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섬기는 섬김은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낮은 마음, 죄인의식으로 시작하지 않은 섬김은
결국 의인의식을 키우는 결과를 낫는다.
그래서 이 섬김은 자신의 의를 높이는 결과를 낫는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긍훌이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긍휼이 없다.
다른 사람을 섬기기도 하고
베풀기도 하고 예배도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긍휼의 마음이 없다.
종교적 행사는 누구보다 잘하지만,
헌금도 많이 하지만
봉사도
섬김도 많이 하지만
그 속에 다 자신의 높고,
자신이 잘하고,
자신이 높아서 나누고 베풀고 하는
의인의식으로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긍휼이다.
내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경험했던 용서 속에 있던 하나님이 긍휼!
그 긍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기를 원하신다.
긍휼 없는 섬김과 봉사와 헌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칼이다.
긍휼 없는 자신의 수고와 봉사와 섬김과 말은
결국 칼이 되어 사람들의 심장을 도려낸다.
그것을 모르니 사람을 죽이고도 당당하다.
나에게
우리에게 이 당당함을 빼야한다.
내 손에 칼을 내려야 한다.
긍흉 없는 모든 사역과 수고는 다 내려야한다.
자비는,
긍휼의 공통점은
받은 대로 베푼다.
자비를 경험해야 한다.
긍휼을 체험해야 한다.
기적이 아니다.
능력이 아니다.
오직 자비와 긍휼이 내 안에 불붙듯 경험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참 믿음의 길을 갈수 있게 된다.
*첫 선교사역을 했던 미들버그의 움뚤루지라는 마을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첫 마음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