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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을 외우지 마라 2

주기도문을 외우지 마라 2

 

 

 

 

 

 

 

주기도문을 외우지 마라2 (눅18:1-8)

 

 


 

용서의 핵심은 뭔가?
믿음이다.
이 문제는 몇일 전에 "욥의 마지막 시험"이라고 (눅17장 1-10) 말씀을 나누었다.

그런데 17장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는 용서뿐 아니라
능력을 나타내는 핵심이다.
뽕나무를 바다에 던져 심기우라 해도 이루어지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연자맷돌매고 바다에 던지는 실족은 용서의 문제다.
그 용서의 문제에 제자들은 믿음으로 응수했고
믿음과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종으로서 당연한 의무라 했다.

그리고 나병환자를 통해 용서의 궁극적 목적, 믿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가야 완전한 용서와 믿음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 완전함은 하나님 나라로 연결이 되고 마지막에 참 믿음을 보겠느냐고 17장의 이야기를 맺고 있다.

그리고 오늘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기도를 설명하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기도보다
믿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도를 이용하고 있다.

17장에서 5,6,19절로 믿음의 이야기를 연결해오다 18장에서 기도를 통해
참 믿음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봐야한다.

우리는 오늘 본문 즉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기를 통해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하는
기도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용서의 본질이 믿음처럼,
기도의 본질도 믿음이다.

예수님이 구한 능력은 기적이 아니라 용서이다.
평생 예수님이 구한 자신의 능력은 기적이나 표적이 아니다.
사람들이 기적과 표적을 구할 때도 삼일 동안의 요나의 표적을 말했다.
삼일, 즉 십자가는 용서의 마침표요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핵심이다.
예수님의 간구는 죽음을 넘어가는 것 이면에 용서의 강을 넘는 것이다.
참 능력은 기적이나 표적보다 용서라 했다.
우리가 구할 것은 용서의 능력이다.
그것을 가지면 다른 능력은 작은 문제다.

18장의 기도는 17장의 실족 즉 용서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기도의 참 능력과 담대함은 용서로부터 나와야 참 능력이 된다.

용서를 맛보지 않은 사람은
기도의 항상과 낙망치 않음의 믿음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용서,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의 맛을 알지 못하면 항상과 낙망치 않음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핵심은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이다.
17장에서 실족 즉 용서로 시작된 이야기는 믿음으로 연결이 되고
이 믿음은 기도를 통해 증명되어지는 것이다.

그냥 간구는 믿음이 아니다.
용서를 지난 믿음만이 항상과 낙망치 않음의 완성을 이룬다.


우리는 기도를 끈질긴 기도가 좋다라고 생각한다.
끈질긴 기도 낙망치 않고 항상하는 기도는 좋다.
그러나 그 전제인 용서를 완전하게 지나지 않은 기도는 절대 항상과 낙망치 않음을 지나지 못한다.

그래서 내일 나오는 기도의 핵심은
낮아짐이다. (세리의 기도)
용서 받은 자의 다른 얼굴은 낮아짐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참 믿음의 기도는 용서를 지나야한다.
누구도 용서를 지나지 않은 기도와 믿음의 행위는 예수님이 찾으시는 기도와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그 다음 본문이 영생에 관한 이야기다. (부자청년)
자신이 용서받은,
자신이 무엇을 가졌던지 죽을 죄인으로 용서하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자신은 그냥 부자이지 용서받은 부자로 살지 못한다.

믿음은 용서와 연결되어 이해되지 않으면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단어이다.
주기도문도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이 아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외우는 것이 아니다.

주기도문은 사는 것이다.

살아야 할 기도의 내용을 주문처럼 외우니 거기에 능력이 없다.

아무리 계명을 지켜도 문제가 거기에 영생이 없는 것은
용서의 강을 지나지 않아서이다.

이 용서의 강은 내가 먼저 지나야한다.
그래야 다른 자를 용서할 수 있다.

그래야 거기에 실족이 없고,
그래야 거기에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다.
그래야 거기에 뽕나무를 명하여 바다에 던지는 능력이 있다.
그래야 거기에 하나님의 참 영광이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참 모습은 하나님처럼 용성하는 삶이다.
기도에 필요한 믿음은 나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체험하고 누리는 담대함이다.
그 담대함이 기도의 핵심이요
항상과 낙망치 않음의 이유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시대가 발달할수록 합리와 이성으로 이 용서의 무한한 사랑의 신비를 계산하려 한다.
용서는 계산이 아니라 그냥 떨어지는 폭포수에 물을 맞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기도의 능력도
우리의 삶에 믿음의 능력도 없는 것은
자꾸 복음을 용서 없이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요
그 용서를 머리로 생각하고 합리와 이성으로 제한하려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용서라는 강을 지나야한다.
그것이 죽음이다.
용서라는 자아가 죽어지는 강을 지나야 참 믿음이 온다.

주기도문은 외우는 것이 아니다.
주기도문은 사는 것이다.

용서이다.

그래서 내일 본문 9절의 시작은 자신이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에 대한 비유이다.
용서를 지나지 않은 사람은 의롭다고 여긴다.
철저히,
자신의 모든 행위는 의로움이 된다.
그래서 용서를 지나지 않은 열심은 사단의 전략이다.

용서의 강을 지나지 않은 모든 사역자와 직분자와 성도들은 새로운 자신의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의 복음과 상관없는 길을 가는 자들이다.

철저히 죄인되어 완전한 용서의 강에서 헤엄을 쳐야한다.
그래야 그때부터 세상은 나에게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될 수 있다.

천국은,
하나님 나라는 용서가 회복된 나라이다.
사단과 하나님과의 다른 유일한 한가지는
오직 용서이다.

세상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의 유일한 다른 점은
용서를 경험하고 용서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의 능력은 용서의 강을 지난 믿음이다.
주님은 끝까지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 용서의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용서의 삶을 살아내는 삶이다.


그래서 참 승리 참이김은 십자가 용서입니다.
우리에게 이김은 용서여야합니다.

기도의 참 능력과 마지막은 용서를 지난 믿음입니다.
용서해야 항상이 되고 낙망치 않음이 됩니다.
용서해야 용기가 생깁니다.
용서해야 참 기도가 됩니다.
우리의 구할 능력은 기도의 능력이 아니라
용서의 능력입니다.
거기에 참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기는 용서의 크기입니다.
우리의 크기는 용서할 수 있는 크기 만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보내신 뜻을 행하는 것이 양식이고
그의 용서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양식이라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예수를 믿고 무슨 대단한 것을 이루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의 위대성은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것에 있습니다.

기도!

나를 용서하고,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이 능력이고
구하는 다른 모든 것은 이것을 구할 때 함께 오는 보너스입니다.


용서의 끝은 십자가~!
자신의 죽음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얻는 용서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몸부림은 용서에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으로 용서를 증명해 내는 것이 이 땅에서 우리의 마지막 사명입니다.
용서할때 하늘의 길이 열립니다.

욥의 마지막 시험은 용서였습니다.
그를 저주하고 욕하고 비난한 친구들을 위한 화목이요 예배였습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는 용서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용서였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세사람의 기도의 공통점은 용서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자꾸 내 뜻을 하늘에 이루려 합니다.
복음은 하늘의 뜻을 이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하늘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세상적이요 마귀적이요 정욕적입니다.

참 복음을 알지 못하니 용서의 삶이 아니라 상향성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할수록 허전함만 더하고 외로움만 더합니다.

세상의 것으로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용서를 통해 만족을 주시고
기도의 참 맛을 알게하십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수록 용서는 없습니다.
그 말은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나를 향한 십자가의 용서를 내가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니 복음이 없습니다.
믿음도 없습니다.
거기에 하나님 나라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물은 날마다 내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부인합니까?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하늘의 뜻은 하나님의 용서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인데
우리는 자꾸 내 뜻을 실현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내 뜻이 중요하지 용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뜻을 위해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용서하는 삶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용서를 알게 하고
용서를 보게 하고
용서를 증명해 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 없는 복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용서 없는 기도
용서 없는 전도
용서 없는 선교
용서 없는 교회는 아무것도 아니요
더욱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하늘에 이루려는 바벨탑입니다.

바벨의 핵심은 자신의 뜻을 하늘에 이루고자 하는 사람의 본성의 성입니다.

그 바벨을 쌓고자 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하고 더욱 섬기는 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시작은 용서이고
십자가를 지는 핵심은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용서가 됩니다.
더욱 십자가의 용서가 내속에 사라지니
내 속에 용서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처음 만났던 십자가가 사라진 교회는
용서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가 되고
용서를 모르니 믿음도 기도의 능력도 없는 교회가 됩니다.
회칠한 무덤입니다.
평토장한 무덤입니다.

복음과 거리가 먼 우리를 오늘도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교정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깊이 깨달아
삶속에 복음의 능력이 내 안에 다시 충만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 우리 집에서 다시 200키로를 가면 관광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인
God's window 입니다. 하나님의 창문이라는 뜻인데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는 풍경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창문으로 보는 풍경같다해서 붙인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믿음도,
기도도,
용서 그리고
복음도 우리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에서 봐야합니다.
그래야 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Pastor Seo

Pastor Seo